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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思春期)와 사추기(思秋期)

아빠로 살아간다는 것(9)

by 소방관아빠 무스

사춘기(思春期), 한자 뜻대로 하자면 봄을 생각하는 시기이다. 우리 첫째와 둘째는 이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중학교 3학년인 첫째는 이제 그 시기를 거의 빠져나오려 하고 있는 듯하고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는 이제 막 들어섰다. 사춘기와 질풍노도의 시기는 거의 극과 극의 단어인데 이게 왜 인생의 같은 시기를 지칭하는 말로 같이 쓰이는지 예전부터 좀 궁금하긴 했다. 내가 사춘기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아빠가 되고 보니 알 것 같다. 사춘기는 본인이 느끼는 그 시기의 감정이다. 봄을 생각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 뛰고 설레이지 않는가? 그게 사춘기 소녀들(소년들은 모르겠고...)의 감정이다. 그에 반해 질풍노도는 주변 사람이 보는 그 시기의 청소년의 모습이다. '몹시 빠르게 부는 바람과 무섭게 소용돌이 치는 큰 물결' 국어사전에는 질풍노도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외부인(엄마, 아빠, 선생님, 기타 등등)이 그 애를 보기에는 이렇게 보인다.


얼마 전, 일요일 아침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일어나는 아침이라 난 기분 좋게 눈을 떴다. 며칠간 내리던 비도 그치고 새소리도 들리는 것 같아 더욱 기분이 좋았다. 일찍 일어난 셋째(셋째는 날 닮아 아침형 인간이 틀림없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는 엄마를 닳아 부엉이형(?) 인간이다.)와 조금 놀아주다가 셋째를 데리고 언니들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정신없이 자고 있는 언니들을 셋째가 깨워주리라는 소박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니들이 자고 있는 침대에 셋째를 살며시 놓아주었다. 이렇게 하면 셋째가 침대 위를 기어 다니면서 언니들을 깨워주겠지... 하지만 이런 나의 기대는 순식간에 깨져 버리고 말았다. 자고 있던 둘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나에게 이렇게 소리쳤기 때문이다.

"아빠는 지금!, 주은이를 데리고 내 방에 들어오면 어떡해!"


"주은이가 내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이랑 내 물건들을 마구 헝클어뜨린단 말야!"


'나! 원! 참!, 동생을 데리고 자기 방에 들어왔기로서니 아빠인 나한테 이렇게까지 소리를 치다니...'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이 녀석의 눈에 불이 나게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이려다가 조용히 셋째를 안고 방을 빠져나왔다. 얼마 전, 아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당신, 딸들한테 잘해!, 둘째도 이제 그거 시작했어, 둘 다 질풍노도의 시기야, 이 시기에 잘못하면 애들 결혼할 때까지 딸들한테 말이 안 통하는 아빠가 될 수도 있어!"


얼마 전, 애들이 자기들 먹은 과자 봉지도 안 치운다고 내가 툴툴거리자 집사람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했던 말이었다. 지금 시기에 딸들에게 꼰대 소리 들으면 시집갈 때까지 그렇게 낙인이 찍힌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셋째를 데리고 애들 방을 나오면서도 내심 섭섭한 감정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내가 지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어릴 때 두 딸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 주면서...


두 녀석 다 내가 자전거를 가르쳐 주고, 줄넘기도 가르쳐 주고, 휴일도 반납하고 녀석들 심심할까 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디로든 떠나지 않았던가?, 아니, 소방서에서 죽기 살기로 불을 끄면서 하루하루 버텼던 것이 알고 보면 결국, 이 녀석들을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까지 찔끔 나오고 서글퍼졌다. 거기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절로 '본전'생각이 났다. 전형적인 한국의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제대로 된 반항도 한번 못해보고 그저 착하게만 보내버린 내 사춘기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아버지가 무서워 '아니요'라는 말 한마디 못 해 봤는데...


내 애증의 두 딸들


그렇게 우울한 표정으로 안방에 들어가니 자고 있던 와이프가 뭔가 낌새를 알아채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았다.


"글쎄 둘째가 자기 방에 들어왔다고 짜증을 내더라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하소연할 데는 없고 자다 일어난 와이프를 붙잡고 한참 동안 내 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와이프는


"그건 채윤이가 아니고 자기가 문제인 것 같은데?"


라며 둘째 편을 들었다. 세상 아무 곳에도 내 맘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와이프는 한마디 덧붙였다.


"남자도 잘 느끼진 못하지만 갱년기를 겪는대... 호르몬의 변화 때문이라나..."


와이프의 말에 따르면 남자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남성 호르몬의 분비가 적어져 별 것 아닌 일에도 우울증을 느끼고 짜증이나 화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맞잖아, 사춘기 애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간 당신이 먼저 잘못한 거지..."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한데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장난이라고 하니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사추기(思秋期)!, 첫째와 둘째가 사춘기를 앓고 있다면 난 사추기를 앓고 있는 걸로...


애들이 봄을 생각하는 시기라면 난 이제 가을을 생각하는 시기가 된 걸까?, 하기야 나도 이제 한국 나이로 50이니 그럴 때도 된 것 같다. 가슴 두근거리던 봄과 화려했던 여름을 다 보내고 쓸쓸히 낙엽 떨어지는 가을을 생각하는 시기, 조금 있으면 눈 내리는 겨울이 찾아오겠지. 그러다 보니 모든 게 허무해지고 맘과 다르게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게다가 같이 늙어가는(?) 마눌과 부쩍 커버린 애들도 자신의 기대에 따라주지 않으니 그들을 위해 바친 청춘이 아깝고 나중에는 배신감마저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또한 지나갈 것이다. 내가 겪는 이런 인생의 시기를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니까 여성의 갱년기와는 차별화된 개념으로 사추기(思秋期)로 이름 붙여 보았다.(만구 나 혼자 생각~ㅋ)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을 좀 더 넓게 먹어야겠다.(남자답게 그렇게~) 사추기 아빠가 사춘기 딸들과 싸우는 모습을 마눌과 셋째에게 보여줄 순 없으니까... 그리고 남성호르몬에 좋다는 음식을 챙겨 먹고 규칙적인 운동과 적당한 휴식으로 이 위기의 시간들을 잘 넘겨 봐야겠다.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위해 오늘도 파이팅이다.~아자! 아자! 아자!


가을 산에서~아자, 아자, 아자~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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