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로 접어들면서 얼마 전 셋째가 열감기에 걸렸었다. 수요일 밤에 와이프가 셋째 몸이 불덩이 같다면서 해열제를 먹인 것이 첫 시작이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유아라면 누구나 그게 걸렸다 낫기를 반복한다던데, 셋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다음날 아침에 와이프가 소아과에 아이를 데리고 갔었다.
"그 선생님, 좀 이상해, 목이나 귀도 같이 봐주시는 줄 알았는데 청진기로 주은이 등에 대고 기침 소리만 들어보더니 감기인 것 같다고, 일단 지켜보자며 약만 지어주시지 뭐야?"
퇴근해서 낮에 병원에 간 것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집사람이 입이 삐쭉 튀어나와 한 말이었다.
"기침도 좀 하는 것 같은데 내일은 요 앞 이비인후과에 한번 데리고 가 봐야겠어, 편도가 부었는지도 모르고, 중이염이 생길 수도 있어. 우리 동네에서 거기가 젤 잘한다더라구..."
그냥 약 먹으면 한 2, 3일 있다가 열 내릴 텐데 뭐하러 다른 병원에 가느냐고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닫고 말았다. 벌써 중 3과 초 6인 두 딸을 길러봐서 육아에는 베테랑일 것 같은 우리 부부도 이런 문제가 나오면 서로 의견이 갈리곤 했다. 그래서 다음 날 와이프와 함께 그 이비인후과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
"잘 때 에어컨 트시죠? 어른과는 달리 이런 애들은 체표면적(?)이 커서 자면서 열을 많이 빼앗깁니다. 요즘 같은 환절기엔 어른들이 덥다고 에어컨 켜 놓으면 이런 애들은 감기 걸리기 딱 좋죠."
집사람 들으라는 듯이 그 선생님은 딱 부러지게 아이의 감기 원인을 찾아내었다. 사실 나는 요즘 거실에서 자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의 말이 내심 반가웠다.
'그럼 그렇지, 셋째가 열감기에 걸린 원인은 집사람 때문이었군...'
난 슬쩍 와이프의 표정을 살폈다. 일그러진 표정이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 같았다. 나의 1승이었다.
"일단 해열제를 먹이면 열이 38도 밑으로 잡힌다니까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죠, 약은 일단 주말 포함해서 3일 치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아이의 상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걸로 봐서 집사람도 나도 신뢰가 갔다. 그래서 약을 지어와 먹이면서 주말을 지나 다음 주 월요일에는 열이 떨어져서 어린이집에 다시 갈 수 있기를 내심 바랬다. 한 이틀이지만 셋째가 어린이집에 못 가는 바람에 나나 집사람이나 하루 종일 교대로 애 본다고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야간근무였기 때문에 주간에 출근하는 와이프 대신에 내가 보고 내가 출근하면 퇴근한 와이프가 애를 보았다.) 열감기에 걸린 애들은 평소보다 더욱 칭얼거리고 밥도 잘 먹으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약도 먹여야 하고 밖에도 나갈 수 없기 때문에 하루 종일 보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다음 주에라도 열이 잡혀서 어린이집에 가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이거 두개는 한짝일까?, 아닐까?~ㅎ^^
그런데 문제는 토요일 아침에 터졌다. 아이의 열이 다시 38도 이상으로 올라간 것이다. 게다가 해열제를 먹여도 열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집사람은 어떡하면 좋냐며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이라도 병원엘 가야 하는데 토요일이니 웬만한 병원은 안 할 테고 종합병원 응급실에라도 가야 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혹시 코로나일지도 모르니 선별 검사소에 먼저 가야 하는 건 아닌지도 헷갈려했다.
"괜찮아, 코로나는 아닐 거야, 얘가 코로나라면 우리가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지. 그리고 열감기는 열이 나야 낫는다구, 인체가 스스로 열을 발산해서 바이러스를 죽이려는 거야, 그러니 열이 나게 놔두고 열을 잘 발산시킬 수 있게 미지근한 물로 아이 몸을 닦아주는 게 좋아."
나는 구급대원 출신답게 와이프의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 주듯 말했다. 왕년에(?) 구급대원으로 뛸 때도 아이가 열 좀 난다고 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엄마들을 보면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열 조금 난다고 죽는 거 아니라고, 열이 나야 낫는 거라고... 하지만 집사람의 견해는 달랐다.
"애 고생하는 건 생각 안 해?, 어디 가서 링거 한방 맞으면 훨씬 수월할 텐데..., 꼭 옛날 할머니들 하는 말만 따라 한다니까..."
내가 구급대원 출신이라니까 자기는 20년 차 베테랑 유치원 교사란다. 아이에 대해선 자기 앞에서 '샷 다 마우스(shut the mouth 그 입 다물라?)' 하란다. 그러더니 여기저기 인터넷을 검색해 보나 싶더니 근처 강서구에 있는 한 어린이 전문 병원이 토요일 5시까지 한다며 거기에 가야겠다는 것이다. 아니, 소아과에서 이비인후과를 거쳐 어린이 전문병원까지? 나로서는 목, 금요일에 갔던 병원 선생님들 말씀대로 좀 더 지켜보면 될 텐데 기어이 다른 병원을 가겠다는 집사람이 정말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가 워낙 강경했기 때문에 아이와 집사람을 태우고 다시 그 병원을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 전문 병원에서 어린이 전문 의사 선생님은 먼저 셋째의 혈액검사와 엑스레이 검사를 해 보셨다. 그리고 내 말대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속으로 또다시 나의 1승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 뒤의 말씀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코로나는 아니지만 다른 바이러스(요즘급격히 유행하는 파라 바이러스였다) 의 감염으로 엑스레이 결과를 보니 그냥 두면 폐렴으로 진행될 수도 있어 링거를 맞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주에도 추이를 지켜보고 폐렴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계속 병원에 와야 하고, 병원에 다닐 동안은 어린이집에 보내면 안 된다고 했다. 여지없는 나의 1패였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집사람은 자기 말대로 여기 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냐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셋째는 혈액검사를 위해 한번, 링거를 위해 또 한 번, 총 두 번 주삿바늘의 따끔함을 맛보고 병원이 떠나가라고 울었다. 나는 그럴 줄 알고(아빠 15년 차의 노련함?) 주사실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으로 유튜브-요즘은 이와 같은 비상상황이 아니면 잘 틀어주지 않는다.-를 검색해서 틀어주었고 셋째는 그걸 보곤 다시 조용해졌다.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고사리 같은 셋째의 손을 보니 가슴 아팠지만 그 보다 더 가슴 아팠던 건 커다란 파스를 붙이고 있는 집사람의 손목이었다. 밤새도록 보채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안고 있다 보니 아프다는 말을 가끔 하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확인하긴 처음이었다.(왜 그랬을까?) 애 셋을 낳고 키우느라 망가질 대로 망가진 집사람의 손목을 보니 마음이 짠해왔다. 46세, 늦은 나이에 늦둥이를 낳아 키우느라 몸 이곳저곳 성한 곳이 없는 데다 직장까지 다니며 힘들어하는 그녀, 집사람은 밤에도 고열에 들떠서 자지 않고 보채는 아이를 안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달랬던 것일까?, 그것도 모르고 거실 소파에서 코를 골고 자면서 불편해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더 이상 똥고집(?) 피우지 말고 와이프 말을 잘 들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와이프를 위해 집에 가는 길에 한의원에 들러 보약이나 한재 지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은 날이 가면 갈수록 모든 것이 변해 간다. 아이가 아플 때 응급처치라든지 육아 꿀팁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엄마들은 계속 나오고 있고 그들의 쌈빡한 아이디어와 정보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이전에 알았던 지식들이 오늘은 무용지물보다 못한 잘못된 정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고집을 피우면 꼰대의 차원을 넘어 '무식한 게 용감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래도 집사람이 20년 차 베테랑 유아교사라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선무당이 아이 잡을 뻔했다. 새로운 지식 앞에서 항상 겸손하기를, 자기가 아는 것이 모든 것이 아님을 항상 인정하기를, 오늘 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해야겠다.
그래도 추석 무렵에는 열감기가 모두 나아서 어린이집도, 할머니 댁도 모두 다녀올 수 있었다. 이만하면 해픠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