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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헤는 밤

아빠로 살아간다는 것(11)

by 소방관아빠 무스

셋째가 18개월로 접어들면서 이제 나름 자기 고집(?)이 생겼다. 뭐가 좋고, 뭐가 나쁘고를 판단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는 말이다. 엄마가 주는 밥은 안 먹으려 하지만 크레놀라가 들어간 시리얼은 눈에 띄기만 하면 달라고 한다.(제 전용 접시에 우유도 없이 부어 주면 그걸 하나하나 먹으면서 맛을 음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동화책을 들고 와서 읽어달라는 듯, 웅!, 웅! 거리지만 채 3장을 넘기기도 전에 다른 동화책을 가져온다. 하지만 휴대전화로 유튜브를 틀어주면 30분이 넘도록 집중하고 있다. 이렇듯 자기 기준에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거부하려고 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부모의 부속물로서가 아닌,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신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좋으면 웃고, 춤추고, 박수치고, 노래(?)하다가도 뭐가 마음에 안 들면 주저앉아 칭얼거리고 나중엔 운다.(우는 척하는 걸지도?...)


우리 셋째는 신기하게도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보다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고 배터리를 교체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왤까?^^;;

요즘 생겨난 또 하나 고약한 -옛날 어른들 말을 빌리면- 버릇 하나는 밤에 잠을 안 잔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녁 8시 반쯤 목욕을 시키고 나서 좀 얼러주면 9시 뉴스의 정각 알림음과 함께 잠에 빠져들던 아기였다. 그런데 요즘은 10시, 11시까지 안 자고 놀자고 한다는 것이다. 뭐가 그리 궁금한지 집에 있는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어보고, 또 그 안의 내용물을 모두 꺼내서 제 손으로 하나하나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가 보다. 그러다 보니 집사람도 힘들어하고 제 언니들도 셋째가 나타났다 싶으면 자기네들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린다. 그러면 서럽다는 듯이 나에게 와서 울면서 안기는데 그 모습이 너무 이뻐서 안아주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노라면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어 버릴 때가 있다. 그러면 난 속으로 '오늘 일과가 끝났구나' 하며 아이를 제 잠자리에 눕힌다. 그래서 아침까지 내리 자면 좋으련만...


이렇게 천사같이 아침까지 쿨쿨 자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새벽 무렵에 다시 깰 때가 있다. 새벽 3, 4시쯤 깨서 칭얼거리면 정말로 답이 없다. 맞벌이를 하는 집사람은 아침이 되면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그나마 내가 그날이 야간에 출근하는 날이면 애를 들쳐 업고 거실로 나온다. 거실은 온통 깜깜하고 공기청정기 불빛 만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다. 애는 당장 내 품에 안겨 있을 때는 조용하지만 살짝 내려놓을라 치면 집안이 떠나가라 운다. 이런 새벽에 애가 안 자고 보채면 부모들도 고생이지만 혹여나 층간 소음 문제로 요새 말이 많은데 이웃에 폐를 끼칠까 노심초사하게 된다.(아직 한 번도 그런 일로 이웃과 얼굴 붉힌 적은 없다, 감사하게도)


그렇게 되면 남은 선택지는 한 가지다. 셋째를 안고 탑돌이가 아닌 테이블 돌이(?)를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집 거실 가운데는 직사각형의 커다란 식탁 겸 테이블이 있다. 식탁으로도 쓰고 애들이 책을 읽거나 공부도 하고, 과일도 깎아먹고, 생일이면 케잌도 불고, 앉아서 TV도 보고 하는 다목적이다. 셋째를 안고 그 주위를 하염없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첫째와 둘째 때는 유모차에 애를 태우고 아파트 단지를 돌았었는데 지금은 그러기도 애매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경주로 수학여행 가서 다보탑, 석가탑을 보고 왔지만 그걸 어떻게 쓰는지는 잘 몰랐었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 보니(내가 낳은 건 아니지만~) 그 용도를 확실하게 알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 탑을 돌며 기원하던 마음이 절로 전해져 온다.


돌고 돌고 돈다... 몇 바퀴, 몇 걸음이 될지 처음에는 가늠할 수가 없다. 보통 100바퀴, 천보를 생각하고 시작하지만 1000바퀴, 만보를 찍을 수도 있다. 돌다 보면 베란다 위로 별빛 몇 개가 반짝인다. 몇 개 되진 않지만 돌면서 베란다 쪽으로 가면 보게 되어 그것들을 보고 바퀴수를 세면서 돈다.


오늘은 별이 한개밖에 없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中에서 -


오늘의 출발을 기다리는 도시의 전철들

이렇게 돌다 보면 어느덧 뿌옇게 날이 밝아오고 저 멀리 오늘의 운행을 기다리는 전철들의 유리창엔 불이 밝혀지고 어느 순간 별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면 보통 셋째는 내 어깨를 벗삼아(?) 쌔근쌔근 잠들어 있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셋째의 잠자리에 녀석을 살며시 눕힌다. '이제야 좀 편하게 잘 수 있겠군' 하고 생각하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또 쉽사리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문득 몇 년 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본가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도 어린 나를 이렇게 키우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점심은 본가에 들러 어머니와 함께 먹으면서 내 어릴 적엔 잠을 잘 잤는지 어땠는지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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