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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

아빠로 살아간다는 것(5)

by 소방관아빠 무스

결혼하고 나서 애는 한 둘쯤 낳으려고 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러면 얼마나 보기 좋을까?, 가족사진을 찍어도 뭔가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왕이면 첫째가 아들이었으면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말은 안 하셨지만 요즘 시대에도 대를 이어 줄 떡뚜꺼비(?) 같은 아들을 원하시는 눈치였고 제일 위로 장남이 떡 버티고 있으면 뭔가 든든할 것 같았다. 그래서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몸이 안 좋다는 집사람에게 혹시나 하며 임신테스트기를 쥐어줬는데 두줄이 나왔을 때는 내 계획(?)대로 뭔가가 착착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안 되는 것을 왜 기억하지 못했단 말인가!, 몇 달이 지나서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에게 태아의 성별을 물어봤을 때,


"아기 옷은 빨간색이나 분홍색 위주로 준비하시는 게 좋겠네요."

라는 말을 듣고 요즘은 남녀공용이라 남자도 분홍색 옷을 입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때 벌써 어머니가 태몽으로 용꿈을 꿨다는 말은 들었고, 이름도 벌써 내가 좋아하는 축구선수인 '주영'이로 정해놨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첫째는 순조롭게 태어났고 간호사 선생님이 기뻐 외쳤던 '귀여운 공주님'이었다. 나중에 출생신고 때는 첫째의 이름을 '수진'이로 정했다.


바로 접니다~ㅋ^^


그래,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니 뭐...


부모님은 조금 실망하신 듯했지만 이런 말로 위로를 해 드렸고 부모님 역시 집사람 귀에는 안 들리게 다음에는 아들일 거라는 덕담을 잊지 않으셨다.


둘째는 그로부터 삼 년 후에 우리에게로 왔다. 어머니는 아예 이번에는 사내애기일 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남자애 옷들을 사놓으셨다. 집사람이 태몽으로 큰 물고기를 잡는 꿈을 꿨다고 어머니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큰 물고기라면 남자지, 물어볼 것도 없어!"


어머니는 용한 점쟁이로 빙의해서 자신 있게 말했다.


"특히 큰 물고기는 높은 벼슬을 할 아주 귀한 아이야, 몸조심하거라..."


어머니는 보약을 해 먹으라며 집사람에게 돈을 쥐어주셨다. 하지만 몇 달 후, 병원에 찾아가니 의사 선생님은 첫째 때와 똑같이 분홍색 계통의 옷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내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는지 그 의사 선생님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의사라고 다 아는 건 아니다, 엑스레이 그거 보고 아들인지, 딸인지 어떻게 알아?, 대학에서 책 보고 나와서 뭘 알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그때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다, 다시 시간은 지나 출산날은 다가왔고 결과는 역시 의사 선생님의 승이었다.


"분명히 아들인데, 아들인데... 이거 하나만 달고 나왔으면... 영락없는 아들인데..."


어머니는 그래도 못내 아쉬운지 신생아의 성기 부분을 몇 번이나 어루만지며 말했다.

점심 맛나게 드셨어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한동안 피임을 했다. 집사람이 월경 주기에 맞춰 계획을 하는 방식이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70년대 표어대로 자녀는 두 명 정도가 우리에게 딱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딸만 둘이라고 대놓고는 아니지만 가끔 서운해하는 부모님께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의 능력 범위나 가정형편을 생각할 때 셋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재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첫째가 열네 살이고, 둘째가 열한 살이고 내가 48살인 2019년 6월에 아내의 임신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가 소방서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첫째의 전화가 왔다.


"아빠!, 놀라지 마, 엄마가 임신했어, 임신했다고!"


"뭐라고?"


난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10년 넘게 이어온 아내의 계획(?)이 빗나가 버린 것이다.


"방금 임신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 나왔어, 엄마 임신이야!, 엄마 바꿔줄게"


첫째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집사람의 목소리도 약간 부끄러워하면서도 들뜬 목소리였다.


"여보, 얼마 전부터 내가 몸이 안 좋고 해서 혹시나 해서 해봤는데, 두 줄 나왔네..."


나도 갑자기 비 오는 날 동창들이랑 기분 좋게 한잔 하고 들어왔던 그날 밤(?)이 뇌리를 스쳐갔다.


"어떡하지?"


아내는 아주 부끄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내의 이 말의 뉘앙스에는 모든 것이 묻어있었다. 셋째를 낳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낳아야지 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그럴까?"


아내는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아내가 기뻐하니 나도 기뻤다.

접니다~이진사댁 셋째딸~^^


그렇게 해서 나는 49살의 나이로 셋째의 아빠가 되었다. 아니, 셋째 딸이 있는 건넌 마을의 이진사가 되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아기를 길러보니 첫째, 둘째 때 느끼지 못했던 힘든 점도 많지만 이제 15개월이 지나니 좀 적응이 된다. 젊은 아빠보단 못하겠지만 그래도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잘 키워봐야겠다. 셋째에게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어머니의 기대를 보란 듯이 깨고 딸로 태어나 준 셋째지만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말이 있는 만큼 곱게 곱게 길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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