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로 살아간다는 것(30)
별일 없으면 토요일에는 막둥이를 데리고 엄니 병원에 간다. 내가 근무일이 아닐 때, 비가 오거나, 엄니나 막둥이가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한다. 토요일은 내가 엄니를 모시러 병원에 가는 날이고 그렇게 되면 아빠가 없어서 막둥이는 집에서 심심해하기 때문이다. 엄니와 막둥이가 모두 만족하기 위해선 그 두 여자를 만나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막둥이가 없으면 아내도 일주일간의 고된 육아에서 벗어나 하루라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변신하기 때문에 심지어 세 여자가 만족하게 된다.
써놓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 비록 내가 좀 힘들긴 해도 세 여자가 만족하는 최선의 시나리오를 나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막둥이를 자동차 뒷좌석에 태우고 엄니가 혈액 투석을 하는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 병원에 가는 동안 심심하니까 아빠 핸드폰 좀 보면 안 돼요?"
뒷좌석의 막둥이가 슬쩍 딜(?)을 걸어온다. 이럴 땐 항상 존댓말이다. 벌써부터 사회생활을 알아버린 막둥이다.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 온다. 하지만 운전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냥 그러라고 한다. 하지만 조건을 단다.
"할머니 만나서 할머니집 갈 때까진 보면 안 된다."
막둥이는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집에서 병원까지 가는 시간이 병원에서 할머니집에 가는 시간보다 길다는 걸 벌써 알아버려서일까?, 설마 그렇진 않겠지?, 어쨌든 그게 나에게도 좋은 시나리오다. 할머니를 만나고 나서도 계속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면 엄니도 서운할 테니까... 그래서 할머니를 만나기 전까지만 핸드폰을 보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막둥이는 할머니를 만나면 그때부터는 끝말잇기 게임을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달려 병원에서 할머니를 만났고 오는 길에 세 명이서 차 안에서 끝말잇기 놀이를 했다.
고양이, 이쑤시게, .............................................................................사슴
사슴이 나왔다. 막둥이의 필살기이다. 얼마 전에 사슴 다음에 내가 슴바귀라고 했다가 막둥이가 울었다. 아빠가 아닌 걸로 쎄운단다. 엄마가 슴바귀는 없다고 했단다. 씀바귀가 맞단다. 그래서 막둥이 입에서 사슴이 나오면 그 다음인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의문의? 1패를 하고, 그렇게 끝말잇기를 좀 더 하다가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할머니 집에 오기 전에 막둥이는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자기가 먹을 자장범벅을 샀다. 물론 내 카드로... 그리고 할머니 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뚜식이' 만화를 자장범벅을 먹으면서 실컷 봤다. 우리 집엔 tv가 없으니까 사실 이 맛(?)에 할머니 집에 따라오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막둥이가 뚜식이를 보면서 자장범벅을 먹는 동안 엄니와 나는 있는 반찬에 달걀 후라이를 2개 구워서 점심 식사를 했다. 이럴 땐 뭔가 제대로 식사를 하는 느낌이다. 집에서 막둥이와 식사를 하면 뭔가 정신이 없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나서 막둥이가 보던 뚜식이 만화를 다 볼 동안 나는 설거지를 한다. 그릇이래야 몇 개 없긴 하니까 금방 하면 되는데 난 좀 천천히 한다. 엄니가 막둥이와 좀 더 놀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막둥이는 뚜식이 만화를 다 보자마자 빨리 가자고 한다. 다음 코스(?)가 남았기 때문이다. 바로 키즈카페다. 막둥이가 일주일 동안 기다려온 코스이자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코스이다. 하지만 엄니는 아쉬운 듯 tv를 보는 막둥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내가 설거지를 마치고 막둥이도 뚜식이 만화를 다 보고 나서 슬슬 일어나면 얼른 방으로 가서 지갑을 챙겨 나온다.
"막둥아, 이거 가지고 그 키즈카페에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어라~"
엄니는 얼른 돈 만 원짜리 하나를 지갑에서 꺼내어 손녀에게 주신다.
"엄니, 왜 이러슈, 집어넣어요!"
내가 만 원짜리를 뿌리치려 해도 기어코 막둥이의 손에 쥐어주신다.
"감사합니다~ 해야지!"
내 말에 막둥이도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감사합니다.'하고 말한다.
"그리고 뽀뽀도 한번 해 드려야지!"
막둥이는 못 이기는 척, 엄니에게 가서 뽀뽀를 해 드린다. 그제야 엄니의 얼굴이 피어난다. 돈 만원치고는 너무나도 눈부신 미소다. 막둥이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아니면 빨리 키즈카페에 가고 싶은지 얼른 문쪽으로 달아난다. 엄니의 손이 허공을 휘젓는다. 나도 엄니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선다.
"엄니, 이제 좀 쉬세요, 그럼 우리 갈게요~"
"그래, 어여 가~"
엄니의 손이 허공을 휘젓는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라고 바깥으로 휘젓는 것인지, 오라고 안으로 휘젓는 것인지 좀체 분간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아파트 문을 열고 나선다. 마지막까지 엄니는 아파트 밖을 내다보며 손을 휘젓고 있다. 우리가 엘베를 타고 내려가 차 문을 열고 자동차에 타는 순간까지 엄니는 베란다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손을 휘젓고 계신다. 우리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