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로 살아간다는 것(15)
크리스마스이브, 걸음마를 하고 나서 사춘기가 지나고 나서까지, 매년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이렇게도 가슴 뛰는 단어가 있었던가? 어린 시절엔 어린 시절대로, 청소년기엔 청소년기대로 설렘과 두근거림에 잠못들던 그날밤들... 어린 시절엔 머리맡에 놓아둔 양말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기대로, 사춘기에 들어선 첫눈과 첫사랑에 얽힌(?) 기대로, 날 잠못들게 하던 밤들이었다. 하지만 내 첫 크리스마스이브의 기억은 역시 산타와의 만남이었다.
다섯살 아니면 여섯살 때의 크리스마스로 기억한다. 우리 동네 골목에서 유일하게 유치원, 아니 탁아소에 다녔던 나는 -이마저도 어머니께 들은 바에 의하면 어머니 친구분의 남편이었던 한 경찰관님의 빽(?)을 써서 들어갔다고 한다.- 어느 겨울날 탁아소 강당에서 뭔가 요란한 행사를 하는 것을 느꼈다.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귀가 아플 정도로 들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강당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은 내 탁아소 생활 1년, 아니, 내 인생 오륙년동안 한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제일 안쪽에, 눈이 부시게 밝은 조명 아래 무대엔 빨간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기른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에 그야말로 풍문?으로 난 그가 '산타 할아버지'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 '산타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고 있었는데 시끄러운 그날의 음향 효과로 인해 발음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이 땡땡!'
"땡땡 아, 뭐해, 니 이름 불렀잖아, 앞으로 나가야지!"
그 할아버지가 정확하게 내 이름을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뒤에 있던 우리 반 선생님의 재촉에 난 뛰는 가슴을 안고 무대로 발을 옮겼다.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갈수록 조명은 더욱 밝아왔고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나자 눈이 부시게 밝은 조명 아래 앉아 있는 '산타 할아버지'를 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근엄하게 수염을 만지며 날 바라보는 모습이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동화책에서 보던 빨간 망토, 눈처럼 하얀 수염과 머리카락, 영락없는 산타할아버지였다. 그런데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난 깜짝 놀랐다. 그는, 아니, 그녀는 다름 아닌 우리 옆반 보모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산타 분장을 하고 있었지만 난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가끔씩 우리 반에 들어와 밀대 걸레질을 하던 그 선생님을 대여섯살 짜리 꼬마들이라 몰라볼 거라 생각한 선생님들의 경기도 오산이었다.~ㅋ
그 산타 할아버지는, 아니 그 선생님은 나에게 뭔가를 내밀었는데 난 그것을 받자마자 산타할아버지가 울지 않는 착한 아이들에게만 준다는 크리스마스 선물임을 대번에 알 수가 있었다. 난 그것을 감싸 안고 다시 내가 있던 뒤쪽 자리로 뛰어갔다. 산타할아버지는 금세 다른 아이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그 선물이 뭘까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풀어본 선물은 아동용 가죽장갑이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던 짝의 선물인 장난감 기차를 보는 순간, 한순간 들떴던 내 마음은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장난감 기차를 받았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산타 할아버지는 왜 내 맘을 이렇게도 몰라줄까 하는 생각이 어린 맘에도 들었다. 하지만 그게 세상 살다 보면 수없이 하게 되는 똑같은 생각의 처음일 뿐이라는 걸 그 때는 몰랐다. 나중에 엄마에게서 그 선물이 엄마가 사서 탁아소 선생님께 전달한 선물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때는 엄마니까 날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산타라는 건 세상에 없는 거구나 하는 깊은 깨달음을 하게 된 열 살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막둥이가, 겨우 21개월밖에 안된 그 녀석이 산타를 만났다고 한다.
1. 빨리 보여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2. (두 손을 모으며) 그거 저 주실 거예요?, 정말요?
3. 어머~ 크기도 하여라, 제가 기대했던 그게 맞겠죠?
4. 선물 주셨으니 할아버지와 기념촬영 한 장~ 찰칵!
설마 21개월짜리가 이런 생각을 하기야 했겠느냐만 어린이집 선생님이 찍어 보내주신 사진에는 막둥이의 이런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작은 네 컷 만화를 그려도 될 것 같다.(선물은 콩*이 병원놀이~요즘 녀석이 가정상비약 상자를 워낙 뒤져서 와이프와 함께 마트에 가서 사 왔다는 건 안 비밀~^^) 막둥이는 오늘 정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중에 막둥이가 크고 나면 오늘 산타를 만나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세히 들어봐야겠다.(설마 나처럼 오늘을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다~)
이렇게 아이를 키운다는 건 나 자신의 어렸을 적 어렴풋한 기억을 다시 되살려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채색이었던 그 기억에 하나하나 색을 입혀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첫째와 둘째 때는 처음이라(?) 정신없이 지나가 버려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막둥이를 키우면서는 그렇게 제대로 해 보고 싶다. 먼저 이번 크리스마스엔 부끄럽고 가슴 뛰던, 흑백사진 같은 내 어릴 적 그날의 기억을 오늘 막내가 만난 빨갛고 하얀 산타의 옷처럼 예쁘게 장식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