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오후 한 시에 출근했다. 연차 중이었는데 마 대리가 연락이 와서 아예 들여다보지 않는 건 보기에 좋지 않다고 잔소리를 하여 억지로 회사에 나오게 되었다.
“선배니히힘!”
사무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후임이 징징거리며 나를 맞이했다.
“미나 씨. 잘 지내고 있었어?”
비어있는 박 과장 자리에 코트와 가방을 던져놓으며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사장님은?”
“계세요.”
“회장님은?”
“다른 회사로 출근하셨어요. 이것 좀 보세요.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후임은 나를 붙들고 속사포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대부분은 이미 가르쳐준 내용이었다.
“이래서 내가 메모를 잘하라고 한 거야. 막상 이것저것 일이 닥치니까 기억 안 나지?”
“네. 죄송해요. 어제저녁에 사장님이 기차 시간 변경하신다고 저에게 전화를 했었거든요. 친구랑 술 마시다가 전화받고 근처 피시방 찾는다고 혼쭐났어요. 선배님은 밖에 있을 때 어떻게 하셨어요?”
“앱으로 하면 되잖아.”
“헉. 생각도 못 했어요.”
“교통편 예약 앱은 다 받아놔.”
“네. 자꾸 쉬시는데 연락해서 죄송해요.”
말끝마다 이응 받침을 붙이던 애교 있는 말투는 그사이 제법 바뀌어있었다.
“괜찮아. 연차 끝나면 연락 안 받을 거니까.”
“아.”
“잠깐만. 나 커피 한 잔만 마시자.”
탕비실에 들어가서 뜨거운 커피를 탔다.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탕비실을 훑어보며 아련한 마음을 가져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커피를 젓던 티스푼을 싱크대에 던져놓고 탕비실을 나왔다.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후임은 받고 있던 전화를 내게 건넸다. 후임에게 입 모양으로 누구냐고 물었으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전화를 받아보니 외국인이었다. 그는 해외영업 담당자와 통화하기를 원했다. 해외영업팀 어느 직원의 내선 번호를 눌러 전화를 돌리고, 박 과장 자리에 앉았다.
“날 왜 바꿔준 건데?”
“외국인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너 영어 잘하잖아. 물어보면 되지.”
그녀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토익 900점이 넘는 애가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건 겸손으로 봐야 되나?”
“진짜 못해요. 전화는 어디로 돌리신 거예요?”
“해외 영업팀. 외국인 전화는 해외영업팀으로 돌려.”
후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 했다.
멀찍이서 아주 큰 목소리로 후임을 부르는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임은 깜짝 놀라며,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허겁지겁 사장실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왔다. 액정이 박살 난 사장의 휴대폰을 두 손 위에 공손히 올린 채로. 커피를 마시다 웃음이 터져서 거의 뱉을뻔했다. 또냐.
“고쳐오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해요?”
“박 과장은 어디 갔는데?”
“손님 의전 하러 가셨어요.”
“그럼 네가 가야겠네.”
“어디로 가야 하죠?”
“네가 보기에 그 폰이 어디 거니?”
“삼성이요.”
“그럼 삼성 서비스센터로 가야겠지?”
“네. 근데 어디 있는지 몰라요. 저는 아이폰을 쓰거든요.”
“인터넷으로 좀 찾아봐라.”
거의 바닥난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밀려오는 답답함을 맘껏 즐겼다. 후임은 자리에 앉아 인터넷으로 열심히 검색했다.
“근처에 있어요.”
“그럼 얼른 다녀오너라. 회계팀에서 법인카드 받아가고.”
“법인카드는 왜요? 1년 안 됐으니까 무상 수리 될 거라고 하시던데요?”
“그냥 카드 받아가라. 액정 공짜로 수리해 주는 거 봤어?”
사장의 폰은 바꾼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새 폰이다. 폰을 산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그는 카메라 쪽 모서리를 박살 내서 가져왔다. 누가 봐도 과격하게 집어던진 처참한 흔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마룻바닥에 살짝 떨어뜨렸는데 이 모양이 되었다며 내게 무상수리를 해오라고 지시했다. 사장에게 액정은 무상수리가 안 될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했을 때 그는 아주 노발대발했다.
“폰을 이렇게 약하게 만들어 놓고 누구더러 돈을 내라고 하는 거야! 어? 무조건 무상 수리해 와. 알아들어?”
그러나 무상수리는 어림도 없었다. 만일을 대비해 회계팀에서 받아갔던 법인카드로 10만 원이 넘게 나온 금액을 사정사정해서 그 아래로 겨우 깎아 결제하는 게 나의 최선이었다. 며칠 후에는 사장이 폰을 물에 잠수시켜 왔다. 그 폰을 가지고 또 서비스센터에 갔다가 액정을 수리해 주었던 기사님을 또 뵈었다. 민망했다.
그때는 깎아달라고 사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상수리가 아니면 얼마가 나오든 나는 욕을 먹을 테니까. 그런데 그로부터 또 며칠 후. 사장이 축축하게 젖은 폰을 내게 건네며 수리를 해오라고 말했다. 그는 화장실에 오래 앉아있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다행히 그날은 박 과장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 대신 서비스센터에 다녀왔다. 수리된 폰을 건네받아 사장실에 들어갔을 때 사장은 깨끗하게 고쳐진 폰에 만족해하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무상 수리지?”
미친다. 그놈의 무상수리.
“액정파손이랑 침수는 원칙적으로 무상수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날 또 뒤지게 혼이 났다.
“네 돈 아니라고 법인카드 막 긁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란 말이야! 말을 했으면 이런 돈 쓰지 않아도 됐을 거 아니야. 어? 1년도 안 된 폰이 무상수리가 안 되는 게 말이 돼? 아, 그리고 이것도 좀 알아보라고. 지금 내 폰이 10년 넘게 회사 명의로 되어있단 말이야. 어? 개인정보 보호법 때문에 본인인증을 죄다 휴대폰으로 해야 되니까 아주 불편해 죽겠어. 회사 명의로 된 걸 내 명의로 바꿀 수 없나?”
“됩니다.”
“문제는, 지금 이 명의가 VIP란 말이야. 내 이름으로 명의를 변경하면서 이 혜택 그대로 가져갈 수 있게 처리하는 방안을 알아봐.”
대꾸할 기력이 없어서 알겠다는 대답만 남기고 사장실을 나왔다. 그게 가능하면 온 국민이 VIP겠지. 나는 그 사안에 대해서 다시 보고하지 않았다.
“카드 받아왔어요!”
“다녀와.”
“계속 계실 거예요?”
“아니. 이제 가야지.”
“앗. 그럼 어떡하죠?”
“뭘?”
“제가 자리 비우면요.”
“외출할 때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줬지?”
“음.”
“대표전화를 휴대폰으로 연결해 둬야지.”
“한 번만 더 가르쳐주세요.”
후임의 메모지에 연결하는 방법을 적어주었다. 후임은 세 번째 시도에서 연결을 성공시켰다.
“제대로 됐는지 회사로 전화 한 통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후임의 폰에서 벨이 울렸다.
“감사합니다. 아, 맞다! 사장님께서 선배님 연차 제대로 쓰는 게 맞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셨어요. 초과해서 쓰는 건 아니냐고 자료를 뽑아달라고 하시던데요?”
“어휴, 시발새끼.”
들고 있던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 가방과 코트를 들어 비서실을 돌아 나왔다. 후임은 사장의 망측한 폰과 법인카드를 들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니? 내가 어디서 자료를 뽑아주랴? 자료는 마 대리한테 뽑아 달라고 해. 난 간다. 앞으로 고생해라.”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을 때, 탕비실 가던 동기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엘리베이터, 비서실, 탕비실, 이렇게 나란히 연결된 세 공간의 끔찍한 조합이 오늘만큼은 조금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동기가 나를 발견했고, 이곳에서의 마지막을 동기와 함께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동기와 나는 스타벅스에 내려가 아이스 라테를 사들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네 후임 얼마 전에 마 대리한테 제대로 혼났어.”
“왜?”
“보직 이동 얘기를 했나 보던데?”
나는 라테를 마시며 가만히 웃었다.
“뭐, 그런 말을 여기저기 하고 다녔나 보더라고. 손님 커피 타러 탕비실에 들어갔는데, 마 대리가 애를 아주 쥐 잡듯 잡고 있더라. 함부로 입 놀리고 다니지 마라, 말투 고쳐라, 테니스 치마 입지 마라, 자리 오래 비우지 마라, 어쩌고 저쩌고. 옆에서 커피 타는 나한테 그렇지 않냐고 몇 번이나 물어봐서 어찌나 난감하던지. 좀 안 됐더라, 네 후임.”
“그런가?”
우리는 카페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회사를 욕했고, 서로를 위로했고, 사장을 욕했고, 서로의 미래가 밝길 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