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선배님.”
후임이 화장실에서 빈둥거리던 나를 찾았다.
“왜?”
“선배님 찾는 전화가 왔어용.”
책상 위에 엎어져 있는 수화기를 집어 들면서 전화기 화면에 떠 있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사장의 아내
였다.
“네. 사모님. 안녕하세요.”
“나 다음 주 토요일 블루 CC 예약이랑 우리 첫째 아들 비행기 예약 좀.”
사모의 목소리는 늘 기분 나쁘게 냉랭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지 사모는 그녀가 가진 권위를 늘 그런 냉정한 말투로 표현하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사장 가족으로부터 사적인 지시를 받는 것 자체가 싫었다. 곱게 부탁해도 언짢을 판에 꼭 이런 식으로 냉랭하게 지시를 내리니 그녀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장의 가족은 단 한 번도 내게 사적으로 연락하거나 사적인 일을 부탁한 적이 없는데, 사장의 가족만 늘 사적인 일로 날 부려먹었다. 사모의 쇼핑을 위해 백화점까지 법인카드 배달하기부터 시작해서 백화점에서 호텔사우나까지 데려다 주기, 첫째 아들을 위한 각종 뒷바라지까지 비서로 있는 동안 사장의 가족을 위한 잡다한 심부름을 심심찮게 했다. 대부분의 심부름은 박 과장이 도맡아 했지만 박 과장이 다른 일로 바쁠 때는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학벌까지 좋았다면 사장 아들의 과외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내 학벌은 고만고만했기에 지금은 퇴사하고 없는 어느 고학력 직원이 사장 둘째 아들의 과외를 2주간 무상으로 해줘야 했다. 무상이 아니었으려나? 모르겠다.
“골프는 2주 전에 말씀해주셔야 한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늦게 말씀해 주셔서 될지 안 될지 불확실합니다.”
블루 CC는 지금 알아봐도 충분히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원칙에 어긋난 지시로 불편한 나의 입장을 굳이 그녀에게 드러냈다.
“어떻게 되든 일단 알아봐 주고. 우리 아들 차편은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고.”
전화를 끊고 왼쪽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첫째 아들 녀석은 사모만큼이나 참 얄미운 놈이다. 그놈은 항상 부모를 통해 내게 갖가지 요청을 했고, 그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전화를 해서 묻도록 만들었다. 마치 내가 그놈의 개인 비서라도 되는 것처럼. 이제 고작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은 놈이 아주 못된 것만 배워서 말이다.
후임에게 첫째 아들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몇 시 비행기로 예약하면 되는지 물어보라고 말했다. 그녀는 해맑게 그놈과 통화했고 나는 그녀에게 비행기 예약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예약번호랑 비행기 시간 문자로 보내주면 끝. 다른 직원들 것도 이렇게 해주면 돼.”
“넹.”
후임이 사장 아들에게 문자를 보내는 동안 나는 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골프 시간을 받았다.
“아까 사모님이 요청한 골프 시간 이거든. 이것도 문자로 보내드려. 번호는 이거야.”
그녀의 노트에 사모 번호를 적어주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김 과장과 박 과장이 함께 올라왔다.
“아이고. 유진 씨 후임인가 봐? 잘 부탁해. 나는 회장님 수행비서.”
김 과장이 후임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용.”
후임은 자리에 앉은 채 밝게 인사했다. 박 과장은 씁쓸한 미소로 후임에게 고개로만 까딱 인사를 했다. 후임에게 싹싹하게 다가가는 김 과장과는 달리 박 과장은 조금 무심해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오후 내내 후임을 옆에 앉혀두고 전투적으로 교육을 했다. 후임이 알아들을 때까지 했던 말을 또 했고, 하지 않은 말은 무엇인지 머리를 쥐어 짜내며 노하우를 뺀 모든 업무 지식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쉬워. 어렵지 않아.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업무로 인해 감수해야 할 고통이 크다 뿐이지 업무 자체가 쉬운 건 맞으니까 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진심도 아니다. 내가 마 대리에게서 업무를 넘겨받으며 들었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을 뿐이다. 그렇게 되풀이하고 보니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뿐이다.
후임이 묵직한 영수증 뭉치를 들고 한숨을 푹 쉬었다.
“어마어마해용.”
“처음이잖아. 익숙해지면 땡땡이 칠 시간도 많아.”
“선배님은 두 분을 어떻게 모셨어용? 한 분만 모셔도 벅찰 것 같은뎅.”
“회장님은 내년에 다른 회사에 가실 거니까 넌 앞으로 사장님만 모시게 될 거야.”
“정말용? 다행이당.”
그녀는 정말 다행스러워 보였다.
“미나 씨는 원래 비서가 되고 싶었던 거야?”
“아뇽. 그런 건 아니에요.”
“근데 왜 지원했어? 비서는 안 맞으면 정말 하기 힘든데.”
“사무실이 강남 한복판에 있어서용.”
“진짜?”
“넹.”
“진심으로?”
“넹! 강남 한복판에서 출퇴근하는 게 제 로망이었어용. 얼마나 멋져용!”
“꿈을 이루었구나. 축하해.”
“감사합니당. 사실 저는 영업팀에 가고 싶었어용.”
“응?”
“면접 볼 때 사장님께서 비서로 1년만 일하면 원하는 부서로 얼마든지 이동 가능하다고 하셨거든용.”
“진짜?”
“넹. 그래서 합격 전화 왔을 때 출근해도 되겠다 마음먹은 거고용.”
“그랬단 말이지?”
“넹. 1년만 일하고 영업팀으로 옮겨달라고 할거예용.”
후임이 까르르 웃었다. 그 희망이 현실이 될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 것 같았다. 1년이면 그제야 일이 몸에 익숙해졌을 시간이다. 근데 그때 보직 이동을 요구하겠다? 사장이 1년만 일해도 보직 이동이 가능하다고 말한 게 진심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모르지만, 후임의 바람이 헛된 꿈이라는 건 확실히 알았다. 그렇다고 그 꿈을 굳이 깨뜨리고 싶진 않았다.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으니까. 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이런 후임에게 구태여 인수인계를 잘해줄 필요가 있는지. 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4년간 이 자리의 터줏대감이었던 나에게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지. 차라리 후임이 비서 지망생이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비서라는 보직에 애착을 가지는 후임을 생각해서라도 좀 더 의욕 있게 인수인계를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사장이 심혈을 기울여 뽑은 비서가 이 모양이라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뽑은 비서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졌는지는 꿈에도 모르겠지.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사장아. 네 비서가 출근 첫날부터 영업팀에 가고 싶대! 네가 그토록 신경써서 뽑은 그 비서가, 알고 보니 비서라는 보직에서 가장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그래. 뜻대로 잘 되길 바란다.”
“감사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