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유진 씨 후임 미나 씨야.”
마 대리가 내게 후임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용. 선배님.”
반쯤은 곶감이 되어가는 비틀어진 홍시 같은 나와는 달리 그녀는 땡땡하고 빛깔 좋은 단감 같았다. 후임은 시종일관 눈웃음을 지으며 밝게 웃었다. 나도 저랬지. 그래서 마 대리가 내게 그만 좀 웃으라고 면박을 줬었지.
“유진 씨 나가고 나서 일 터지지 않게 인수인계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또 뭐가 불만인지 퉁명스럽게 말하곤 자리로 돌아갔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아.
멀뚱히 서 있는 후임에게 박 과장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박 과장 자리에 짧은 테니스 치마를 펄럭이며 앉았다. 여러 장의 인수인계서가 들어있는 서류철을 후임에게 건네며 그녀가 입은 옷을 무심코 훑어보았다.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이건 인수인계서야. 나중에 읽어봐. 회장님은 일찍 출근하시거든. 도착하면 수행비서가 전화할 거야. 회사 전화기에 발신 번호가 뜨니까 누구 전화인지 바로 알 수 있도록 웬만한 번호는 외워둬.”
“넹.”
회사 전화벨이 울렸다. 김 과장이었다.
“여기 번호 보이지?”
나는 검지로 회사 전화기의 화면을 가리켰다.
“이 번호가 회장님 수행비서 번호야. 제일 전화 많이 하는 사람이니까 금방 외워질 거야.”
“넹.”
습관인 듯 말끝마다 부지런히 이응 받침을 붙이는 후임의 깜찍스러운 말투가 상당히 거슬렸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면서 전화를 받았다.
“네. 김 과장님. 네.”
전화를 끊고 후임에게 말했다.
“지금 올라오신다고 하거든. 그럼 일어나서 대기하면 돼.”
나를 따라 후임이 일어났고, 곧 회장이 올라왔다. 내가 인사하자 후임도 따라 인사했다. 회장의 뒤를 따라가며 후임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짧은 치마를 펄럭이며 귀여운 발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 총총 뛰어왔다. 걸어도 될 텐데.
오늘도 어김없이 냄새가 나는 회장의 재킷을 받아 옷장에 걸어두었고, 회장에게 후임을 인사시켰다. 돌아 나오면서 여전히 두 손을 아랫배 위에 공손히 올리고 서있는 후임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황급히 나를 따라 나왔다. 걸어 나오는 복도 위에서 후임에게 말했다.
“사장님은 뒤따라가지 않아도 되는데 회장님은 따라가서 옷을 받아들여야 해. 아까 내가 하는 거 봤지?”
“넹.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매일 이렇게 일찍 출근하세용?”
“아침잠이 없으시대.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신다나.”
“우왕.”
탕비실에 후임을 데리고 들어가 커피를 타게 했다. 그녀가 커피를 타는 동안 나는 홍삼차를 준비했다.
“재킷 걸어드리고 나와서 커피랑 홍삼차 갖다 드리면 회장님에 대한 아침 업무는 끝이야. 간단하지? 미팅이나 방문하는 손님이 없으면 종일 조용히 바둑만 두시니까 별로 신경 쓸 건 없을 거야.”
“넹.”
“자. 갖다 드리고 와.”
커피와 홍삼차가 올려진 쟁반을 후임에게 건네주었다. 후임은 두 손으로 쟁반을 들고 위태로운 자세로 탕비실을 나갔다. 후임의 뒷모습을 보며 자리로 돌아갔다. 곧이어 후임이 빠른 걸음으로 나와 탕비실에 쟁반을 놓아두고 박 과장 자리에 앉았다.
“선배님은 커피잔 어떻게 내려놓으세용?”
“어떻게 내려놓냐니? 그냥 회장님 책상 위에 내려놓지.”
“아. 두 손으로 쟁반을 들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 몰라서용.”
“왼손으로 쟁반 아래를 받치고 오른손으로 내려놓으면 돼.”
“아하! 저는 쟁반 통째로 회장님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 잔씩 옮겼거든용.”
후임이 까르르 웃었다.
“괜찮아. 그런데 다음부턴 쟁반을 회장님 책상 위에 올려두지 말고 회장님 책상 맞은편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옮기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그녀의 편의를 위해 한 손으로 쟁반 드는 법을 가르쳐 줄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별거 아니지만 비서 업무를 더 원활하게 해주는 크고 작은 팁 같은 건 나도 땀과 눈물로 습득한 거니까. 후임도 그 모든 것들을 나처럼 스스로 배우길 바랐다. 그녀와 나와의 능력 차이를 벌써 굳이 줄여두고 싶지도 않았고. 어차피 나는 업무 인계자지 노하우 인계자는 아니니까. 그리고 누구 좋으라고 그걸 다 가르쳐?
“아! 그런데 커피잔 내려놓을 때는 뭐라고 말해야 되나용?”
별 걸 다 묻는다고 생각했다. 나도 신입일 때 이런 것까지 묻곤 했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맛있게 드세요 정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커피 나왔습니다 했어용.”
후임이 또 한 번 까르르 웃는 동안, 나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생각했다. 이 느낌 뭐지?
“사장님은 대략 한 시간 뒤에 도착하실 거야. 가끔 일찍 오실 때도 있는데 도착하면 사장님 수행비서가 전화하니까 그동안은 편하게 있어도 돼. 이리로 와 봐. 몇 가지 가르쳐줄게.”
그녀가 의자에 앉은 채 내 곁으로 이동했다.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며 그녀에게 업무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이게 두 분의 스케줄표야. 아침마다 프린트해서 두 분 책상 위에 올려두면 돼. 내일 같이 해볼 수 있게 8시 15분까지는 출근하도록 해. 일정이 추가되거나 변경되면 적어두시거든? 퇴근하기 전에 수정하고, 수정된 거 수행비서들에게 꼭 알려주고. 이것도 나중에 같이 해보자. 이건 회장님이랑 사장님 지인 연락처야. 엄청 많지? 꾸준히 연락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 사람들 번호는 휴대폰에 저장해 두는 게 좋아. 이건 회장님, 사장님 자료들. 또 이건 임원들 보고자료. 또, 이건 우리 회사 직원들 비상연락망이야. 미리 숙지하면 좋을 것 같아서 아까 준 인수인계서 맨 뒤편에 프린트해서 별도로 끼워놨어. 한번 꺼내볼래?”
그녀는 내가 준 인수인계서 서류철의 중간 즈음을 한참 뒤적였다.
“맨 뒤편에 끼워놨다고 말했는데.”
“아항.”
서류철 맨 뒤에 꼽혀있는 비상연락망을 해맑게 꺼내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 직원들 이름 옆에 4자리 번호 적힌 거 보이지? 그게 회사 안에서 서로 전화 주고받을 수 있는 내선 번호야. 수화기 들어서 그 4자리 번호를 누르면 그 직원의 자리로 연결이 돼. 만약 외부로 전화를 걸고 싶다면 9번을 누른 후에 걸고 싶은 전화번호를 누르면 되고. 한번 보여줄게.”
회사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후임이 앉아있는 박 과장 자리의 내선 번호를 눌렸다. 박 과장 자리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내선전화는 이렇게 거는 거야.”
“넹.”
전화를 끊고 이번에는 9번을 누르고 내 휴대폰 번호를 누르자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외부로 거는 건 이렇게 하는 거고.”
“넹.”
후임은 두 손을 다리 위에 공손히 포개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전화를 끊고 후임을 미심쩍게 쳐다보며 책꽂이에서 서류철 몇 개를 꺼냈다. 서류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잡다한 업무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나는 설명을 멈추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너 내가 말한 거 까먹지 않고 다 기억할 수 있어?”
“넹?”
“메모를 안 하길래 물어보는 거야. 다 기억할 수 있어?”
“해야 하나용? 인수인계서에 적혀있는 거 아닌가용?”
“내가 그 인수인계서에 이런 자질구레한 설명까지 다 적어놨을 것 같니? 너 안 적었다가 나중에 같은 내용 물어보기만 해 봐.”
후임은 가방에서 회사 노트를 꺼냈다. 아무 곳이나 펼쳐서 내게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펜이 없어용.”
펜꽂이에서 모나미 볼펜을 꺼내어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회사 노트에 펜 뒤통수를 톡 쳐서 볼펜 심이 나오게 했다. 오른손으로 펜을 쥐고 노트 위 허공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뭘 쓰라고 하셨죵?”
나는 말했던 내용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했다. 끄적끄적 메모하는 후임을 보면서 아까 후임에게서 받았던 막연한 느낌이 뭔지 확실하게 떠올리려고 애썼다. 뭐지?
잠시 후 사장이 출근했다. 후임에게 커피 한잔을 타서 갖다 드리라고 말했다. 그녀는 사장실에 다녀와서 내게 말했다.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 쟁반 올려놓고 커피잔 옮겼어용.”
“잘했어.”
“이번에는 맛있게 드시라고 했어용.”
“그래. 잘했어.”
“그리고 사장님이 선배님이랑 같이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아우 씨. 쯧. 기분이 다운되었다.
후임과 함께 사장실에 들어가 사장의 책상 앞에 나란히 섰다. 그는 책상을 돌아 나오며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미소로 말했다.
“자자. 테이블에 앉아.”
세상에. 앉아서 얘기를 하자는 건가? 영광스러워서 절이라도 해야 할까 생각했다. 나와 후임은 사장과 마주 보고 앉았다. 사장은 나를 보지도 않았다. 후임만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많아.”
“감사합니당.”
“네 선임은 정말 일을 못 했거든.”
다운된 기분이 더 다운되었다. 기분이 다운되는 것에는 왜 바닥이 없을까.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여서 내가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른다고. 자네는 학벌도 좋고 똑똑하니까 자네 선임보단 똘똘하게 일할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믿어도 되지? 잘할 수 있지?”
“넹.”
“일은 말이야.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넹!”
후임은 아까보다 더 밝고 애교 있게 대답했다.
“좋아, 좋아. 내가 자네를 왜 뽑았는지 알아?”
“아니용. 왜 뽑으셨어용?”
도대체 난 이 자리에 왜 부른 건지. 둘의 지저귀는 간지러운 대화를 자랑이나 하려고 불렀나.
“밝아서야. 밝고 잘 웃어서. 자고로 비서는 회사의 얼굴이야. 분위기 메이커라고. 알아듣겠니?”
“넹.”
“비서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늘 가슴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하라고. 알겠지?”
사장은 후임에게 보이던 다정한 얼굴을 걷어내고 무표정하게 나를 보았다.
“인수인계 잘하라고. 후임의 업무처리 능력은 너한테 달린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말이야. 알아들어?”
“네.”
“알았어. 나가봐. 영업본부장 들어오라고 하고.”
입술을 깨물며 사장실을 나왔다.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뒤따라오는 후임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들었지? 영업본부장한테 사장실에 들어가라고 해.”
“영업본부장님 자리가 어디지용?”
“아까 내선전화 거는 법 가르쳐줬잖아.”
“영업본부장님 내선번호를 몰라용.”
“아까 비상연락망 꺼내놓은 건 어쨌니?”
짜증이 났다. 자존심도 상했고 사장 때문에 괜히 후임까지 미워졌다. 그녀는 회사 노트와 서류철을 뒤적거렸다. 그녀가 비상연락망을 찾는 동안 나는 영업본부장에게 내선전화를 걸어 사장이 찾는다고 말했다. 영업본부장이 사장실에 들어갈 때까지도 후임은 계속 비상연락망을 찾고 있었다.
“됐으니까 그냥 놔둬. 새로 프린트해 줄게. 오늘 오전에는 내가 준 인수인계서 꼼꼼히 읽어.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가르쳐줄 테니까.”
“넹.”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내가 계속 후임에게 받았던 막연한 느낌의 단어. 그건 바로 맹함이었다. 후임에게는 어딘가 맹한 분위기가 있었다. 대놓고 모자란 건 아닌데 묘하게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은. 그토록 떠올리려고 애썼던 어떠한 느낌의 단어를 생각해내고 나니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덩달아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찾았어용!”
가만히 후임을 쳐다봤다.
“접어서 마우스 밑에 깔아놓았었어용.”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부디 그녀에게서 받은 맹한 느낌이 단지 내 느낌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