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문 이사는 끝까지 단 한 통의 연락도 하지 않았고, 사장은 연말까지 일한 퇴직자들에게 성과급을 주지 않았다. 마 대리에게 전화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니, 사규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언제 바뀌었냐고 묻자 성과급이 지급된 날 바뀌었다고 했다. 기대했던 내가 바보다.
구직활동에 대해서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면접 제의가 왔고 결혼하기 한 달 전까지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결과는 신통찮았다. 대부분의 면접에서 나는 화가 많이 났고, 화가 나는 면접의 경험이 늘어날수록 그들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도 거침이 없어졌다. 특히 형편없는 면접관들에게는 더 그랬다.
<어떤 조선기자재회사의 비서 면접>
“비서 경력이 많아서 좋네요. 운전은 합니까?”
“차가 있습니다. 운전 경력은 5년 정도 되었고요.”
“비서가 되면 내 차를 운전해야 해요. 나는 여자지만, 여자 같은 사장이 아니거든요. 접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요. 비서가 되면 술자리는 반드시 동참해야 하고 술도 잘 마셔야 해요. 춤도 잘 추면 더 좋고. 아무쪼록 거래처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비서이면 좋겠네요.”
“저는 술을 못합니다.”
떨어졌다.
<어떤 IT회사의 관리팀 면접>
“나이에 비해 경력이 많아서 좀 부담스럽네요. 어떤 일을 했죠?”
“비서였는데 다른 팀 업무를 가리지 않고 했습니다. 여러 공장의 구내식당관리, 법인카드 관리, 인사관리, 중점적으로는 대표이사 두 분을 모셨습니다.”
“우리는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도와줄 보조직원을 뽑고 있어요. 음료 기계를 청소한다든지, 쓰레기통을 비운다든지 하는 각종 보조 업무들 말이에요.”
“채용공고에는 관리팀이라고 나와 있던데요.”
“물론 관리팀 소속이죠.”
“청소하는 분을 뽑으시지 그러세요. 고작 쓰레기통 비우고 커피 기계를 정리하는 보직에 경력 5년이 넘는 저를 불러서 면접을 보고 계시는 거예요?”
떨어졌다.
<어떤 건설회사 비서 면접>
이 면접에서는 사장이 날 자리에 앉히지도 않았다. 사장이 앉은자리 앞에 선 채로 면접을 봐야 했다.
“어머니는?”
“주부세요.”
“아버지는?”
“일 하세요.”
“무슨 일?”
“직장 다니십니다.”
“무슨 직장?”
“그냥 직장이요.”
“동생은?”
“자영업 해요.”
“결혼은?”
“네?”
“나이가 있어서 묻는 거야.”
“내년에 할 예정입니다.”
“그럼 됐다.”
“면접 끝인가요?”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떨어졌다.
<어떤 스타트업 회사의 면접>
후미진 산업단지였다. 사무실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그의 작은 사무실은 담배 냄새로 가득했다.
“이따가 우리 아내도 올 건데 조금만 기다립시다. 커피?”
그는 낡은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꺼내어 내게 주었다. 그의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창업하자마자 이익을 얼마나 냈는지, 전망이 어떤지, 언제쯤 사무실을 이사할 건지 진지하게 얘기했다. 수많은 가식적인 면접에서 환멸을 느낀 나는 이 열악한 공간에서 눈을 반짝이며 자신감 있게 말하는 그에게 조금은 설득이 되었다. 잠시
후, 그의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나는 그 세 명을 앞에 두고 면접을 보았다. 그는 나의 비서 경력을 높이 샀다. 그는 줄 수 있는 최선의 연봉을 제시했고, 나는 어딘가 미심쩍은 마음으로 수락했다. 그는 아주 기뻐하며 앞으로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첫 출근날, 사무실에는 더 고약한 담배 냄새가 났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느끼며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은 외부에 있었고, 산 중턱에서나 볼 법한 간이 화장실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구린내가 진동했다. 뒷걸음질 치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구식 컴퓨터 앞에서 별거 아닌 업무 몇 개를 배우고, 회계사무소장과 미팅을 했다. 사장은 소장에게 아내를 회사 직원으로 올려 이득을 취할 방안이 있는지 물었고, 소장은 그것에 대해 열심히 답했다.
4시가 되자 사장은 더 할 일이 없으니 일찍 퇴근해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와 차를 타고 액셀을 미친 듯이 밟으면서 산업단지를 빠져나왔다. 어느 길가에 보이는 프랜차이즈 카페 화장실에 뛰어들어가 허겁지겁 소변을 봤다. 온 몸에서 풍기는 담배 찌든 냄새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다음 날 아침, 사장에게 출근하지 않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여러 통의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어떤 부동산회사 비서 면접>
결혼하기까지 두 달이 남았다.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면접에서 미끄러졌고 이제는 화장실만 멀쩡하면,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곳만 아니면, 어디든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면접을 보러 간 곳은 신축 건물이었다. 사무실도 깨끗했다. 직원들의 인상도 좋았고, 사장도 점잖았다.
“나이가 결혼 적령기인데, 혹시 남자친구는 있어요?”
나는 사장에게 두 달 후에 결혼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아, 나는 미혼, 기혼 따지지 않아요. 보다시피 우리 여직원 모두 아이가 있는 주부고, 나 또한 주부를 더 선호하니까요.”
떨어졌다.
일주일 후, 회사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재면접을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처음 면접을 봤을 때보다 더 단장을 해서 그들이 원하는 시간에 면접을 보러 갔다. 며칠 후 합격 통보를 받았고, 2주일 뒤에 출근하기로 약속했다.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가족과 예비신랑에게 알렸으나 출근하기 3일 전, 합격이 취소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유를 물으니, 퇴사할 사람이 계속 일할 수 있게 되어서 그렇다고 했다.
<어떤 철강회사 비서 면접>
나이가 지긋한 사장 하나에 어린 비서 한 명이 있는 작은 회사였다. 대기업의 자회사라 그런지 사무실이 꽤 준수했다. 사장은 나를 보자마자 굉장히 만족해했다.
“이력서를 보자마자 딱 이 사람이다 싶었어요. 주소를 보니까 집이 아주 멀던데, 원한다면 이 근처 좋은 오피스텔에 숙소를 잡아줄 수도 있어요.”
“감사한 말씀입니다. 근데 제가 곧 이 근처로 이사를 올 예정이라 숙소는 괜찮습니다.”
“이사는 왜 오죠? 부모님과 다 같이 오나요? 혼자 이사 오는 거면 굳이 돈 들이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했다.
“곧 결혼해서요.”
“뭐요!?”
“저는 결혼 후에도 쭉 일을 할 생각입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면접을 보러 온 거요? 곧 결혼할 사람을 어느 회사에서 뽑아요? 결혼하면 애 낳는다고 그만둘 거 아니요? 지금 있는 저 비서도 처음엔 오래 일하겠다고 하더란 말이요. 일한 지 이제 1년 됐는데 유학 간다고 그만둔다잖소. 나는 오래 일할 직원이 필요하단 말요! 다른 회사에서도 당신을 뽑지 않을 거요. 결혼하고 애를 어느 정도 키워놨다면 모를까. 아, 나는 그것도 싫지만, 결혼한다는 사람을 누가 뽑겠소?”
“사장님. 결혼과 상관없는 직원도 다양한 이유로 그만둡니다. 저와 사장님의 마음만 맞으면 제가 결혼하는 것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오래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이력서를 보자마자 얼마나 기대를 했는데. 속상해 죽겠소!”
그와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는 좋은 사장님 만나 좋은 회사에서 오래도록 일하는 게 꿈입니다. 취직을 위해 결혼할 계획이 없다고 거짓말할 수도 있었지만, 서로가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면접에서도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한 것처럼 사장님께도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사장님이 그 이유로 저를 채용하기 불편하시면 그냥 채용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솔직하게 말한 건 제 결정이고, 사장님도 사장님 뜻대로 결정하시면 됩니다. 결과가 어떠하든지 저는 수긍할 것이고요. 그러니까 저에게 이제 그만 화내세요.”
결혼하고 나서는 계약직 위주로 이력서를 넣었다. 기혼이 되니 면접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다. 사회가 판단하는 기혼여성에 대한 온도는 냉담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노동청에 구직 신청을 했다. 상담사에게 결혼 때문에 죄다 미끄러졌다고, 돈이 얼마든 멀쩡한 사무실에 취직만 할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상담사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면서 내게 주방보조를 권하거나 교육에 참석하라는 문자만 반복해서 보냈다.
남편은 내게 더 이상 이력서를 넣지 말라고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얼른 아이를 가지자고 그랬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떠한 구직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경력은 단절이 됐고, 아이는 5년 동안 생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