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후

18화

by 노이망



경쾌한 키보드 소리.

잔잔하게 들리는 음악 소리.

블라인드 사이로 내려쬐는 따뜻한 햇살.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점심 먹고 나른해진 기운을 기지개로 털어내며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경력단절 10년을 꽉 채우고 간신히 취직한 이곳에서 일한 지도 1년이 넘었다. 업무 시간 내내 초긴장 상태로 손발을 떨며, 새가슴으로 적응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한결 여유롭다. 그토록 원했던 커리어우먼의 삶.


결혼한 지 5년 만에 어렵게 생긴 아이도 이제 6살이다. 회사의 배려 덕에 전업주부 때의 시간표와 다름없이 육아도 가능하다. 직장생활에서 억울함밖에 경험하지 못했던 나로선 이 배려가 신기하고 감사하기만 하다. 그렇기에 나도 자연스럽게 업무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 회사와 내가 함께 상생하는 느낌, 참 좋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담임 선생님의 전화였다. 괜한 긴장감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은 새 학기 등원 차량 시간이 10분 정도 당겨질 거라 말했고, 나는 문제없다고 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픈 게 아니고, 다친 게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다는 마음.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휴. 아무 일 없다. 그러면 된 거다. 책상 위에 반쯤 남은 아이스 라테를 마시고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오후 4시,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서둘러 짐을 챙겼다. 회사 동료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라 유치원으로 향했다. 해가 기울기 전 아이를 데리러 가는 편안한 퇴근길. 차창 밖으로 스치는 밝은 풍경이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특별하다. 퇴근 후 다시 집으로 출근하는 기분이지만, 이른 퇴근이 주는 여유는 삶의 질을 확실히 상승시킨다.


유치원 앞에 차를 세워두고 현관에 들어가서 아이를 데리러 왔음을 선생님께 알렸다. 하원으로 분주한 선생님들. 현관 입구에서 하원 차량을 기다리는 아이들. 어떤 아이는 멍하고, 어떤 아이는 끊임없이 재잘대는 저마다 다른 모습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그중 가장 어여쁜 내 아이가 계단에서 내려와 쑥스럽게 손인사를 하며 자신의 신발을 챙겨 왔다. 터프하게 신발을 신고 나서 어머니께 인사 그리고 선생님께 인사. 아이의 손을 잡고 차를 향해 걸어가는 길에 똑같이 물어보는 나의 질문. 오늘 뭐 하고 놀았어? 그리고 매일 똑같이 돌아오는 아들의 대답. 똑같지 뭐. 쿨한 대답이 오늘따라 섭섭해서 다시 물었다.


오늘도 친구들이랑 블록놀이 재미있게 했어?


나 블록놀이 제일 싫어해.


나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피식 웃었다. 유치원에서 블록놀이를 제일 즐긴다는 담임 선생님의 피드백은 그럼 뭐냐고. 내 자식의 마음을 아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 저녁 뭐 먹지. 반찬을 시킬까. 배달음식을 시킬까. 떡볶이가 먹고 싶긴 하다는 생각. 그런데 이틀 전에도 떡볶이 먹었네. 집에 들어가자마자 샤워부터 시키면 편할 것 같은데. 과연 오늘은 순순히 따를 것인가. 저녁을 먹고 여유 있게 씻기면 아이는 좋아하겠지만, 재우기 전 빠듯한 일정은 정신적으로 좀 버겁다. 오늘은 어떻게든 미리 씻겨버리자. 뒷좌석에서 간식 없냐고 물어보는 아이에게 없다고 대답했다. 히잉 하는 귀여운 소리를 들으며 가방에 준비되어 있던 젤리 한 봉지를 건네자 낙심했었던 아이는 평소보다 두배로 기뻐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기려 했지만, 실패. 6살이 되면서 논리적 반항이 상당이 발전했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돈가스를 배달시켜 배불리 먹인 후 협박과 회유를 골고루 사용하여 씻겼다.


지금 샤워하면 80분 놀다 잘 수 있지만, 나중에 샤워하면 20분밖에 못 놀아. 하기 싫은 거 꾹 참고 먼저 해버리는 게 언제나 이득이야. 알잖아.


씻기고 나오니 퇴근한 남편. 그의 손에는 햄버거가 들려있다. 사랑해.

남편과 햄버거를 먹는 동안, 아이는 블록으로 가장 좋아하는 비행기를 위한 비행장을 만들며 놀았다. 블록놀이 제일 싫어한다더니.




자기 싫다며 눈물 세 방울 뚝뚝. 달래 재우고 나니 8시 반. 작은 한숨이 나왔다. 오늘도 무사히 보냈다는 생각. 피곤하지만, 나쁘지 않은 하루였으니 이거면 충분하다는 생각. 아니, 감사할 따름이라는 생각. 그러나 내게 남은 할 일이 너무 많다는 불만. 내 일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갑갑함. 빨래. 설거지. 기타 등등의 모든 집안일을 남편과 함께 숨 가쁘게 끝내고 나서 샤워를 하고 식탁에 앉아 다이어리를 쓰고 나니 10시 반. 폰을 보다가 잘까, 야식을 먹을까, 책을 읽을까. 선택은 자유롭지만, 기분은 다운된다. 단 하루만, 완벽하게 혼자 있고 싶다는 바람으로 침대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핸드폰을 들고 시계를 확인했을 때, 예상치 못한 카톡에 잠시 몸이 굳었다.


[유진 씨 아들이 벌써 많이 자랐네. 난 회사를 다시 차려서 새로 홀로서기하고 있어요. 아프리카와 두바이에서 열심히 뛰고 있어. 행복한 얼굴의 톡 프로필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반가워. 가정의 무궁한 행복을 빌게.]

[아, 두바이라 한국은 새벽 시간이겠네. 혹 새벽잠을 깨웠다면 실수를 눈 감아 주삼.]


11년 전 퇴사한 회사 사장의 톡이었다. 내가 퇴사한 지 3년 만에 사업확장 실패로 상장폐지되고 대표이사 자리에서도 해임되었다는 소식은 건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되게 꼬시다고 생각했는데, 1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사장의 카톡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물론 지금 내게 사장의 전화번호는 없다. 톡 친구도 아니고. 그런데 사장은 아니었나 보다. 헛웃음이 나와 잠깐 킬킬거렸다.


여보. 일어나 봐. 웃긴 얘기 해줄게. 결혼 전 다녔던 회사 사장이 갑자기 톡 보냈어.


남편이 깊은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누구?


나는 묘한 흥을 느끼며 아이를 깨우러 갔다.




업무 하는 내내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하는 재미가 상당했다. 급한 일을 끝내고 나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사장님. 거의 11년 만이네요. 잘 지내세요? 사장님께서는 여전히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시는군요. 멋지세요. 당시엔 사장님 되게 미워하면서 퇴사했었는데, 그래도 제가 모신 사장님이었다고 간간이 생각나곤 했어요. 저는 퇴사 후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 어려울 거라던 사장님 예언에 따라 재취직 실패하고, 10년 동안 경력단절 백수로 살다가 작년 1월에 철강 회사 취직해서 좋은 대우받으며 즐겁게 일하고 있답니다. 여전히 잔잔바리 실수 하면서요. ㅋㅋㅋ 아시죠? 오랜만에 안부 들으니 반가워요. 하시는 일 다 잘되시기를 바라요. 타국에서도 건강 잘 챙기시고요. 행복하세요, 사장님.]


사장의 답장은 늦지 않게 왔다.


[내가 미나 씨에게 잘못한 게 있었나 봐. 하하. 내 기억엔 없지만, 미나 씨가 그렇게 느꼈다면 용서하고. 나가지 말라고 말리는 입장에서 다른 데 가기 어렵다고 막말을 했나 보네. 미워하는 감정이 있었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어요. 미나 씨에게 실수한 자회사 대표도 사임시키고, 그 이후 직장 내 성희롱 관련 제도도 만들고 전 직원 교육 프로그램도 만들었는데, 그런 나쁜 감정이 내게 있었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가? ㅎㅎ 청강 회사라면 거의 내가 아는 회사이고 대표들도 거의 다 아는데, 미나 씨 상냥하고 미소가 많아 잘할 거야. 혹 내 도움이 필요하면 톡 주세요. 항상 미소 잃지 말고 행복해요]


[미나 아니고 유진이요.]


[앗 미안. 마지막 비서가 미나라 아무 생각 없이 썼네요. 유진 씨가 내 첫 비서였고, 아무튼 내 비서 수행하느라 고생했어요. 프로필이 바뀌어서 사진 보니 유진 씨 아들이 많이 커서 놀랐고, 행복한 미소 보니 반가운 마음에 톡 보내게 되었어요. 정말 정말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사장님도 행복하세요.]


이게 뭐지. 이 무슨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운 마무리람. 나는 오래도록 묵혀둔 응어리가 한순간에 해소되는 것을 느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미나는 결국 영업팀으로 못 갔나 보네. 사장의 마지막 비서였단 걸 보면 회사가 망할 때까지 비서로 있었다는 거잖아. 그걸 깨닫자 피식 웃음이 났다. 혼자 계속 웃었더니, 옆자리 동료가 물었다.


뭐 재미있는 일 있어?


응. 말해줄까요?


어디 들어보자. 마침 심심했는데.


제가 결혼하기 전에 비서로 일을 했었거든요.




-끝-



keyword
이전 17화닫힌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