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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Mar 22. 2021

김말순 여사의 장례식 -19-

다시, 벚꽃

다시 벚꽃이 피는 계절이 왔다. 완연한 봄 날씨였다. 기온이 평균 18도로 따스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추워졌다. 더 이상 코트를 꺼내 입지 않아도 될 정도의 날씨가 되자 끊임없이 밀려오는 미세먼지와 황사에도 쉽게 맘이 설렜다.


항상 벚꽃이 피는 4월이 되면 꽃몽오리가 다 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봄비가 내려 꽃잎이 모두 떨어져 버린다. 그 전에 만연한 벚꽃을 눈에 담아야 한다. 올해엔 벚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거리를 걸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같이 벚꽃을 보러 갈 사람이 생겼다.

벚꽃을 닮아 해사한 그녀는 정말 봄이라는 계절에 잘 어울리게 이름조차 봄이었다.

우리는 작년, 글을 쓰기 위한 온라인 소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경계할 새도, 거부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빠져드는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그녀로 향하는 애정을 미처 깨닫지 못한 나는 감정이 커질 대로 커진 후에야 멈출 수 없다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미 봄은 완벽한 나의 이상형이었고 난 첫눈에 그녀에게 반한 상태였으니.


눈치가 빠른 연인을 두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녀는 나의 습작들을 가만히 읽어보고 남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수많은 글자 속에 숨겨져 있던 나의 정체성을 빠르게 파악했다.

처음 그녀가 내게 고백했을 때 무슨 대답을 해야 할 지 몰라서 굉장히 망설였다. 그녀가 정말 오랜만에 나타난 내 스타일이라서 거절하고 싶지 않았지만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용기도 없었다.


이상하네, 전부터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라고 당차게 묻는 그녀 때문에 당황했다. 그동안 그녀에게 숨 쉬듯 플러팅을 해온 내 행동을 돌이켜 보면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배드민턴 치자고 꼬셔. 커피 한 잔 하자고 불러. 동네 한 번 걷자고 꼬셔. 이유도 각양각색으로 대며 만나자는 내게 그녀는 단 한 번도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예전에 오래 만나던 사람이 결혼을 이유로 이별을 통보했다, 고 더듬더듬 고백했다.  사람이 온전히 나와 같은 성향일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그 사람이 선을 보고, 다른 남자와 결혼 준비를 하는 것을 까마득히 몰랐던 나의 멍청한 지난 시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나의 모든 마음을 바쳤던 내 하찮은 순정에 대하여.

그 때의 충격이 너무 컸고 더 이상 상처받을 용기가 없어서, 이제 누구도 사랑할 자신이 없다고.


이렇게 시작도 하기 전에 내게 굴러온 이상형을 놓치는 날이 오다니. 너무 아쉽고 아까웠다.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내게 그녀는 큰 눈 가득 눈웃음을 지으며 정말로 매혹적으로 웃더니 말했다.


- 그런 것이 걱정이라면 아무 문제 없어요. 전 이미 십 대 때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했거든요.


두 분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한다는 말을 그녀는 채 끝맺지 못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에게 달려들어 키스한 건 나였다.

세상의 모든 벚꽃 잎이 우리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말캉한 입술을 건너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라가모 인칸토 참의 청량하고 달달한 향이 나의 모든 불안을 잠재웠다. 

우리는 얼마 되지 않아 같은 집에 살게 되었고, 그녀는 내 평생의 뮤즈가 되었다.


아빠는 전보다 더 열심히 큰집에 들렀다. 효도의 수준을 넘어 집착이라고 볼 수 있는 아빠의 행동은 예전과 달리 할아버지를 원망하지도, 탓하지도 않는 듯했다.

한때 부모가 돌보지 않는 가정을 이끌기 위해 청춘을 다 바쳤던 아빠는 그저 세월의 한 자락에 지난 날의 설움을 녹여낸 듯 보였다.

이제 할머니도 안 계시니, 할아버지에게 더 잘하겠다는 다짐을 하신 듯하다. 집에 들러 할아버지를 고, 밥을 사 드리고, 할머니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게 유일한 아빠의 취미로 보였다.


할아버지는 눈에 띄게 쇠약해져 갔다. 원래 아내를 보내면 남편은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라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고작 이년여쯤 되었을 뿐인데 이젠 혼자서 잘 걷지도 못하신다며 아버지는 슬퍼했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제 손으로 죽인 꼴이 되었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더 이상 회사일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신과 상담을 받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수척했다.

막내 작은어머니가 몸에 좋은 한약이며 제철음식을 해다 바쳤지만 날이 갈수록 말라가는 그의 모습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밤마다 소리를 지르며 악몽에서 깨고, 홀로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린다 했다.


회사에서는 갑작스러운 그의 퇴사를 묵묵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병원 진단서가 그의 상태가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었기도 했고, 알고 보니 예전에 그가 회사의 한 기안서를 잘못 판단하고 결재하여 회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고 했다.

그 피해규모가 5억여 원이었고, 대기업이지만 양아치 기질이 있는 그 회사는 책임을 최고 책임자인 막내 작은아버지에게 물었다. 책임을 모두 안고 바로 사표를 쓸 것인지, 5억원 어치를 무급으로 일할 것인지.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외국에 나가 자신을 의절한 자식들에게 보낼 생활비와 집에서 자신만 보고 있을 명목상의 아내를 위해 그는 대출로 5억을 받아 회사에 변상했고, 오랜 기간 동안 대출금을 갚으며 살았다.


난 그 날 작은아버지의 고백을 듣고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아빠나 엄마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스스로 충분히 죗값을 치르고 있었다.


고모는 장례식 때 보여준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했다. 무려 다섯살 연하라고 했다. 아빠는 혀를 끌끌 차며 그나마 떼어 먹힐 재산이 없어서 다행이다, 했다. 그 새끼가 누나 돈 많은 줄 알고 헛물 켜는거야, 정신차려 했다가 고모에게 등짝을 맞았다.


셋째 작은아버지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호주로 떠났다.

그와 연락이 닿는 형제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겠거니, 다들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나는 그가 부디 작은어머니와 딸을 만나 부디 잘 살기를 바랐다. 예전에 내게 보여줬던 그 예수와도 같은 평온한 모습으로 다음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타나기를.


정호 오빠는 카센터를 차렸다.

오랜 세월동안 변변찮은 직업 없이 대강 살던 그가 큰 결심을 한 것이다. 먹고 살기에는 기술직이 최고라며 그는 우리들의 차를 모두 고쳐주겠다고 했지만, 난 할머니 장례식 때 돈봉투를 빼돌리던 그의 모습이 아른거려 슬슬 피했다.


지난 명절 때, 넷째 작은아버지의 딸  뜬금없이 흑인 남편과 함께 큰 집에 방문했다. 결혼 소식을 듣지 못했던 할아버지만이 어리둥절했다.

그는 어디선가 빌려온 듯한 어색한 한복 차림으로 선미와 나란히 할아버지께 큰 절을 올렸다.

예의를 차린다고 한 번 더 큰 절을 올리려는 그에게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집어던졌다. 우리는 아메리 조크라며 할아버지를 뜯어 말렸다. 

부모도 몰래 혼인신고를 올린 그들은 서로가 뭐가 그리 좋은지 큰집에 있는 내내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항상 우리와 어울리지 않은 채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이 간간히 떠올랐다. 지금의 그녀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들이 자작곡이라며 들려준 노래는 어디에선가 한 번쯤 들어봤던 멜로디로 시작했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 얼굴이 다들 볼 만했다.


노래가 끝나고 쉽사리 감상평을 내놓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아빠가 용감하게 총대를 맸다.

너희가 유명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곧 구치소에서 만나겠구나 하고 빈정대는 아빠의 말을 선미는 멋대로 남편에게 생전 처음 들어보는 훌륭한 노래라고 번역해 전달했다. 뭣도 모르는 그는 아빠에게 서투른 한국말로 칭찬 감사하다고 하여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이렇게 그저 그런 잔잔한 일상들이 계속기를 소망한다. 모든 일이 다시 반복될 할아버지 장례식이 부디 천천히 다가오기를 바라며.

그 날이 오면 지금도 충분히 균열이 가 있는 저 이씨 가문 형제들이 영영 서로를 찾지도 보지도 않을 테니. 부디 할아버지가 오래 오래 살아주시길 바란다.


난 모든 이야기의 해피엔딩을 좋아하기 때문에.


-19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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