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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Mar 22. 2021

김말순 여사의 장례식 -15-

이브와 선악과

내 첫사랑은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다. 유난히 피부가 희었던 그 애는 내 짝이었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에 웃는 모습이 워낙 예뻐서 나는 그 친구가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항상 곁에 졸졸 따라다녔다.

이런 내 행동을 유난히도 질투했던 다른 친구들이 왜 나는 항상 그 친구만 찾고 그 친구에게만 잘해주냐며 뭐라고 할 때 깨달았다.

이 감정이 단순한 우정뿐만이 아니겠구나, 하는 마음과 더불어 나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구나, 라고.


워낙 어릴 때의 감정이라 우정과 사랑을 착각한 것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중 2때 같은 학원을 다니던 짧은 커트머리의 친구에게 강하게 꽂혔을 때 내 자신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쾌활했고 고요했다. 마치 이분법적인 시선속에 갇혀있는 비너스처럼.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이나 붉은 입술, 머리칼이 짧게 솟아난 하얀 목덜미 등을 볼 때면 이따금씩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녀의 한 톤 낮은 음성은 때로 내 귀에 천상의 노랫소리처럼 달라붙었고, 그녀의 유난히 까맣고 투명한 눈동자에 시선이 닿으면 저절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때로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 모르는 문제 등을 물어보거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떠들었고, 나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때로 나는 그녀에게 닿을 수 없는 마음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손만 대면 친구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 있으나 가까워질 수 없는 상황이 날 몹시 비참하게 만들었다. 결국 난 그 학원을 그만두기 위해 일부러 기말고사를 망쳤다. 어이없는 성적에 엄마는 당장에 학원을 옮겨 주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 저절로 괜찮아 지겠지 싶었지만 나는 이성에겐 어떠한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피하고 싶어서 억지로 다른 반 이성을 만나 보았지만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것은 내가 노력한다고 지워지는 감정이 아니었다.

내 감정을 들여다보고 깨달은 순간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 후로도 계속 가망 없는 짝사랑에 꽂히며 혼자 마음을 달래고 친구라는 명목으로 그들과 가까워지긴 했으나 희망고문일 뿐 우정 그 이상의 단계로 발전할 수는 없었다.


성인이 되어 온라인 만남으로 나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냥 모든 것이 편했다.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되는 나의 감정들이 편했고 그동안 친구인 척 다가섰던 나의 미성숙한 애정을 마음껏 쏟아내도 된다는 안심이 날 기쁘게 했다.

부모나 친구를 대하는 태도와는 많이 다른, 그녀를 연인으로 대하는 조금 낯선 나의 모습 또한 내 자신을 깊이 알아가는 기회여서 좋았다.

나는 이 짧은 삶을 살면서 얼마나 내 자신과 마주하지 않은 채 살아왔는가.

나는 얼마나 내 솔직한 감정을 마주보지 못하고 끝없이 부정하며 포기하고 살아왔는가.


그녀는 나의 이상형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언제나 하얀 피부에 입술이 붉고 가녀린 체형에 눈이 크고 짧은 머리칼을 가진 단정한 이미지의 여자를 좋아해왔다.

그녀는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길게 찢어진 눈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체격이 탄탄했으며 머리는 허리까지 오는 장발이었고 귀는 온통 피어싱 투성이었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나도 드디어 상대방의 감정에 상관없이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생겼다는 안도감이 나의 취향보다 더 컸다.


우리는 서로 많은 것을 공유했다. 많은 도시를 여행하고, 같이 수업을 듣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같이 밥을 먹었다.

나는 언제나 한식을 좋아했는데 그녀와 만나면서 양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책에 도통 관심이 없었으나 날 만나며 도서관 데이트를 즐겨하게 되었다.

서로에 대한 짙은 감정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커진 후에는 같은 집에서 생활했다. 함께 꿈을 꾸고 별나라를 떠돌며 서로를 깊이 공감했다.

가 던진 농담에 녀가 깔깔 웃을 때면 세상 모든 햇볕이 내게 쏟아져 내리는 착각이 들었다.


그녀를 만나는 동안 나는 그동안 말로만 들어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전설 속의 공간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다다를 수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갈 용기조차 내지 못했던 바로 그 공간에 그녀가 내 손을 잡고 올려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생에 걸쳐 이뤄야 하는 모든 것을 이룬 기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워낙 동성과의 스킨십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자유로운 나라여서 우리는 마음껏 세상에서 우정으로 포장한 사랑을 공유했다.


그렇게 그녀와 2년을 만나고 피치 못할 사건으로 헤어진 후 나는 밀려오는 우울감을 견뎌내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는 모든 일에 급히 지쳤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홀로 감정을 갈무리 하는 일로 충분히 버거웠다.


그 후로도 계속 여기 저기서 마주치는 나의 이상형 그녀들은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보통 사람들에게 축복이라면 내게는 한정된 저주였다.

세상이 쓸데없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눈치만 빨라졌고, 각종 언론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기사나 취재가 쏟아질 때마다 혹시 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눈치채면 어쩌지 라는 공포 어린 불안감만 더해졌다.

나는 점차 말수가 줄었고 감정을 숨기는데 익숙해져 갔다.

내 자신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나를 밝혔을 때 모든 사람들이 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일이 두렵다.


누구도 미움 받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만인에게 드러냈을 때 영원히 미움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아예 미움 받을 원인을 차단하는 것이 원칙이겠지.


아무리 외로워도 그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위로 받을 수가 없었다.


-15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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