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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Mar 22. 2021

김말순 여사의 장례식 -16-

VVS

모두 벙쪄서 막내 작은어머니 입만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가 뭘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통쾌하다는 듯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큰아버지도 말을 잇지 못하고, 다른 형제들은 감격인지 놀라움인지가 뒤섞인 표정으로 그녀의 입술만 응시하고 있었다.


발인이 모두 끝나고 우리는 큰집에 모여 앉아 상복을 갈아입었다. 다같이 둘러앉아서 가장 원초적이고 핵심적인 질문, 그 많은 조의금을 누가 다 먹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 나는 조금 지켜보다가 슬쩍 집으로 자리를 뜰 셈이었다. 핑계를 대고 바로 가도 좋았겠지만, 솔직히 내게 떨어질 돈이 아니니 어느 정도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신이여, 저 욕심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부디 구원하소서.


막내 작은어머니가 흠흠, 헛기침을 하고 말을 시작하는 것부터가 영락없는 지난밤의 데자뷰였다. 그녀는 전처럼 격앙된 어투를 완전히 풀고 조근조근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시집왔을 때 막내 작은아버지가 해준 이야기와 자신이 파악한 우리네 형제들과의 관계.

물론 자신은 조의금이 탐나지만 올바르고 공정하게 나눠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

자신의 앞으로 들어왔으니 원래 자신들의 것이 맞다는 주의의 환기도 한번 시켜주면서, 그녀는 주장을 이어 나갔다.

자신이 처음 고모와 아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감명 깊었다는 것. 물론 옛날에는 맏이들이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일이 흔했지만 맏이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와중에서 고모와 아빠가 각자의 인생을 사는 대신 오랫동안 가족을 위해 일하지 않았는가.

누구도 이렇게 자신을 돌보기보다 형제들을 키우느라 진을 빼진 않을 것이다, 라고 말을 조근조근 이어가는 그녀의 화법에 모두 빠져들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모두가 그래서 핵심이 뭐야? 라고 온통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드디어 뜸들이던 결론을 말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공정한 나눔이란 똑같은 액수로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이 잘 살도록 애써준 사람에게 좀 더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비교적 못 사는 가족들에게 베풀어야 하지 않겠냐, 라고 말하며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가족보다도 형제들을 양육하느라 수고한 고모와 아빠에게 가장 큰 지분을 주려고 한다, 고 선전포고를 했다. 고모는 뚱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흠칫 놀랐다. 아빠는 누가 봐도 딴 생각을 하고 있다가 몹시 놀랐다.

셋째 아주버님과 넷째 아주버님은 크게 뭘 받지 않아도 각각 땅과 아파트를 받으셨다면서요, 라고 말하며 그녀는 마지막 말을 끝맺었다.


형제들 중 누구도 키워준 값에 대해 제대로 감사를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우리들은 먹고 살기 팍팍한 삶이었기 때문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사실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전달하는 일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감히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나마 젊은 날을 희생해 준 고모와 아빠에게 보답을 드리려 한다.

아마 어머님도 이런 일을 원하셨을 거예요, 라는 그녀의 말이 끝나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모두 벙쪄 있었다,

어쩌면 타인이라고 볼 수 있는 막내 작은어머니가 자신들의 앞으로 들어온 조의금을 이런 식으로 쓸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한동안 주위가 고요했지만 그 정적을 깬 것은 셋째 작은아버지였다.


- 그동안 당연히 감사를 전했어야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네. 고마워 형, 누나. 우리가 당연히 챙겼어야 하는 일을 제수씨가 챙겼네.


넷째 작은아버지도 거들었다.


- 누나랑 형 덕분에 나도 교수까지 할 수 있었던 거지. 어쩌면 어머니나 아버지보다 더 고마워했어야 했는데, 깨닫지 못해서 미안해.


어색하게 감사인사를 서로 전하는 가운데 다시 조용해진 주위 속에서 내내 말이 없던 큰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둘째랑 누나. 내가 그동안 너무 역할을 못해서 미안했다.


고모가 울음을 터뜨렸다. 장례식장에서 눈물 없이 소리만 크게 냈던 울음과는 달랐다. 그녀는 자기가 이런 생색을 내려고 너희를 키운게 아니라며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고 장례식 내내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아빠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막내 작은아버지가 그들을 껴안자 다른 형제들도 다같이 다가가 그들을 안았다.


전형적인 신파의 한 장면이었다. 나는 K-신파 알러지가 있지만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돈의 액수보다 그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알아준 그들의 태도가 고모와 아빠의 한을 풀어주는 듯 보였다.


다시 울음바다가 된 큰집을 뒤로 하고 천천히 나왔다. 그들의 묵은 감정이 정리될 때 까지 기다린다면 나는 아마 집에 가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동안 정리하지 못한 채 서로 얽혀버린 형제 간의 감정들은 그들이 알아서 풀도록 하고.

이제는 정말로 집에 갈 시간이다.




-16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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