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관예배는 큰아버지가 아닌 평소 할머니가 다니셨던 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진행했다.
장례식장에서는 그래도 할머니가 오랜 시간 사셨고 자는 듯 잘 가셨다는 분위기가 컸기에 크게 슬픈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입관은 달랐다.
지하에 위치한 입관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다같이 타면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항상 실없는 소리로 분위기를 띄우던 셋째 작은아버지조차 조용했다. 고요한 기류가 계속해서 식구들 사이를 조였다.
사도신경으로 예배를 시작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짤막한 설교와 기도를 하는 내내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여자들 보다 남자들 수가 많았기에 통곡을 하거나 혼절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여자들이 많으면 혼절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였다.
누워 계신 할머니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도 더욱 작았다. 앙상한 체구가 수의에 감싸져 있었고 핏기 없는 낯에는 하얗게 분이 올라와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꽃분홍 립스틱이 진하게 발라져 있는 그녀의 모습은 화려한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짙은 슬픔이었다.
할머니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화장품을 얼굴에 발라본 적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얼굴에 분이며 립스틱을 칠하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의 귀와 코와 입을 막고 있는 탈지면을 보니 더욱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아주 낯선 감정이었다.
장례지도사는 관에 할머니를 넣기 전 할머니에게 저마다 차례로 인사하라고 했다.
우리는 한 줄로 서서 조금 초조한 기분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할머니와의 추억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나의 차례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문득 할머니를 마주하면 울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울 필요까진 없다고 내 자신을 달랬다.
이 모든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왜 입관식에 굳이 내가 참여했는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할머니의 감은 눈과 마주하니 뭐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명절 때 방문해도 우리는 서로 나눌 대화가 없어 서로를 피했다. 삐쭉대며 인사만 겨우 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안방에서, 우리들은 거실에서 모여 티비나 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무슨 애정이 있다고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려나. 난 짧게 목례하고 서둘러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넘겼다.
막내 작은아버지가 아주 오랫동안 할머니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게 보였다. 평소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란 막내였으니 저렇게 할 말도 많겠거니 싶었다.
전해지지 않을 인사말을 길게 전하는 것도 보통 사랑으론 할 수 없는 행동일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1년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산 적이 있었다.
당시 전기공사를 하던 아빠는 자만심에 장갑도 끼지 않고 맨 손으로 작업을 하다가 2만 5천 볼트에 감전되는 사고를 당했다.
온 몸이 불에 활활 탔던 아빠는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몸에서 썩은 냄새를 풀풀 풍기며 반쯤은 죽고 반쯤은 산 사람처럼 몇 개월을 지냈다.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무너져 내린 얼굴을 한 아빠는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게 뽀뽀를 해 달라고 했고, 나는 진물이 줄줄 흐르는 아빠의 얼굴에 기꺼이 입을 맞추었다. 뒤에 서 계셨던 외할머니는 내가 너무 어려서 더러운 줄도 모르고 뽀뽀를 한다며 수군거렸다.
분명히 아빠의 귀에도 들릴 정도의 수군거림이었다.
난 더러움과 깨끗함을 구별할 줄 몰라서 아빠에게 입맞춤을 한 게 아니었다. 이 장면이 내 인생에서 아빠와의 마지막 추억이 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한 것이었다.
그 후 아빠는 며칠 간 의식이 없다가, 영원히 하늘나라로 떠나셨더라,는 이야기의 한 장면이 마치 내 인생이 될 것만 같아서.
당시 문병 온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의연했다.
우리 가족 모두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는데, 할머니는 곰탕에 밥 한 공기를 말아서 푹푹 잘도 자셨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마음을 졸일 필요가 전혀 없다고 했다.
무교인 나와 엄마는 속으로 염병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아빠가 할머니에게 극진한 효도를 하는 것을 본 엄마는 내게, 충청도 사람들은 부모가 자식에겐 사랑을 덜 주어도 자식은 부모에게 모든 걸 다 바친다는 근거 없는 지역비하를 했다.
당시 엄마와 한바탕 크게 싸워서 사이가 좋지 않던 할머니가 다른 친척들에게 전부 전화를 걸어서 절대 우리를 도와주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명절 때 온갖 핑계를 대며 시댁에 방문하지 않았던 엄마는 그 일을 계기로 시댁과 온전히 인연을 끊었다.
돈이 없던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은 외가 친척들과 아빠의 친구들이었다. 아빠의 친구들은 저마다 보증도 서고 집도 저당 잡히며 병원비를 마련해 주었다. 피를 나눈 형제들보단 우정을 나눈 친구들이 더 낫다, 라는 게 그때부터 정립된 나의 가치관이었다.
어렸던 나를 맡길 곳이 없어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할머니 집에 맡겨졌는데, 덕분에 난 1년 내내 지각을 했다. 아무리 일찍 나와도 학교에 빨리 가지 못했다. 그렇게 같이 살았는데도 애교없고 싹싹하지 못한 나는 통 조부모와 친해질 수가 없었다. 온통 데면데면 했다.
햄이나 소세지 등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였던 내게 그 집에서 그나마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메뉴는 라면과 계란후라이가 전부였다. 김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은 없었고 온통 식탁이 나물 밭이었다. 원래 할머니가 비싸다는 이유로 계란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었다.
엄마는 할머니 집에서 세수나 양치를 할 땐 꼭 물을 틀어 놓고 하라고 했다. 집에선 일주일에 한 번쯤 하는 목욕도 이틀에 한 번씩 하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행동을 시키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어른들의 세계는 너무 치졸하고 더러웠다. 그럼에도 말 잘 듣는 딸이고 싶었던 나는 물을 틀어놓고 세수나 양치를 했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추접스러운 복수를 세운 어머니는 그 후 몇 십 년간 집에서 물을 튼 채 씻는 딸을 견뎌내야 했다.
이미 한 번 습관이 들어버린 일은 바꾸기도 쉽지 않았고, 나 스스로 바꿀 생각조차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주말마다 나를 교회로 데려갔다. 주말에 느지막히 잠도 자고 집에서 빈둥대고 싶었는데 오전 6시부터 나를 깨워 단정한 옷을 입히고 한시간 쯤 버스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교회로 데려갔다.
지루한 예배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아빠와 함께 교회를 갔을 때에는 그나마 두세 시간이면 끝났는데, 오전 일찍부터 늦은 저녁이 되어가도록 할머니,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시간을 너무 견디기 힘들었던 나는 교회 안에 마련된 도서관에서 온갖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으나, 명목상 도서관이었던 그 곳은 내 흥미를 끌만한 책들이 많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있는 대로 읽었다.
목사님이 무의미한 찬송을 한 곡 더 부르고, 다시 기도를 하고, 장례지도사는 마지막 진행을 했다.
남자들을 불러 할머니를 감싸 안은 천을 말아쥐고 관 속으로 넣게 하였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울음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고요해보려고 노력하던 나의 감정도 점점 널뛰기 시작했다. 그냥 회사에서 전화가 온 척 핸드폰을 받으며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장례지도사는 관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할머니에게 꽃을 바치라고 했다.
식구들이 다시 할머니에게 꽃을 한 송이씩 바치러 줄을 섰다. 꽃을 놓으면서 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씩 하라고 하자 새삼스럽게 저마다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사랑했다느니, 키워줘서 고맙다느니, 오랫동안 고생하셨다느니 하는 그런 흔한 인사말을 전하며 그들은 구슬프게도 울었다.
문득 프로포즈를 받은 친구의 생각이 났다. 남자 친구와 연극을 보러 가는데 그 날따라 남자 친구가 눈에 띄게 꾸물거렸다고 한다.
결국 공연에 20분 정도 늦었고, 딱히 늦은 것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는 남자 친구에게 자신은 잔뜩 기분이 상했다.
다행히 공연은 시작하지 않았고 내용이 꽤 재미있어서 상했던 기분도 잊은 채 열심히 관람했다.
연극이 끝난 후 자신의 머리 위로 느닷없이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졌다.
배우가 능숙하게 프로포즈임을 알리는 진행을 하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관객들이 자기에게 꽃을 한 송이씩 주고 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주위가 온통 꽃무더기였다, 라는 간질간질한 친구의 이야기가 왜 지금 할머니의 모습과 겹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살아계실 때 꽃다발을 드렸다면 좋았을 것을, 그녀에게 그 누구도 꽃다발을 준 사람은 없었다. 꽃과 잘 어울리는 그녀의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서글펐다.
고모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방언을 했다. 천사의 노랫소리라고 불리는 방언은 들을 때마다 익숙치 않다.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쏟아내며 고모는 온 몸으로 슬픔을 표현했으나 평소보다 좀 더 미친 듯한 그녀의 모습을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는 것이란 평생에 걸쳐 어머니를 원망하는 이들이나, 사랑했던 이들이나 공평하게 슬픈 법이다.
내 차례가 되었다.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할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언젠가 내 몸을 씻겨주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모가 오냐오냐 키웠던 나는 스스로 내 몸조차 씻을 수 없었고, 항상 그녀는 내 목욕을 도와주었다.
살이 빨갛게 익을 정도의 뜨거운 물에서 날 박박 닦이는 그녀의 왼쪽 젖꼭지 위에 큰 사마귀가 나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한 젖꼭지가 두 개인 것처럼 징그러웠다.
난 목욕하는 내내 징그러워 하면서도 그녀의 젖꼭지를 만졌고 그녀 또한 별도의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그녀의 싸늘한 얼굴과 그 사마귀가 난 젖꼭지가 겹쳐지며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그 어느 날 지루해 하던 나를 위해 앞마당에서 참새를 잡아주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집착이 심했던 나는 귀여운 참새를 조그만 주머니에 가만히 넣고 싶어했고, 참새는 쉬지 않고 날개를 퍼덕거리다가 제 풀에 지쳐 그만 죽어버렸다.
더 이상 참새가 움직이지 않자 난 막연한 두려움에 할머니에게 참새를 치워달라고 했고, 할머니는 얼씨구나 하고 참새를 삶아 먹어버렸다.
먹으며 그녀는 여러번 내게도 권했지만 난 도저히 먹을 용기가 없었고 맛있게 먹는 그녀의 모습을 긴 시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의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내 인생에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그녀의 몇 안되는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할머니,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세요.
나는 할머니 위에 엎드리며 참았던 울음을 어엉, 터뜨렸다. 한번 쏟아진 울음은 갈무리 되지 못한 채 제방이 무너지듯 끝을 모르고 터져나왔다.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른 채 나는 하염없이 울음을 터뜨렸고 그런 나를 고모가 꼭 안아주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오래 전에 씻었던 것처럼 찌들고 묵은 내가 났지만 상관없었다.
차라리 그 냄새가 나의 몰아치는 슬픔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12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