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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함 Mar 27. 2023

사귀는 건 싫지만 로맨틱한 관계는 유지하자는 그 남자

[제4편] 계획할 수 없는 연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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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디지털 노매드 트여르크와의 첫 만남은 지난 글을 확인해 주세요.



썸에게 팔찌를 선물했을 때의 효과


별 큰 생각 없이 만들어준 비즈 팔찌가 트여르크와 나의 관계에는 신의 한 수가 된 것 같다. 돌이켜보면 팔찌는 상당히 전략적인 아이템이다. 베트남 같은 여름국가에서는 누구나 팔찌 한 두 개씩은 하고 있기 마련이라 일상에 노출되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 항상 시선 끝에 머물러 눈이 자주 가게 되는 아이템이다. 유니세프, 초록어린이재단 등 국제기구나 비정부기구에서 후원금에 대한 대가로 팔찌를 선물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내 신체 일부에 있는 이 아이템을 볼 때마다 매번 조금의 친숙함 또는 애정 또는 소속감이 더해지는 효과가 있다.



트여르크는 프리랜서 웹 개발자인 관계로 굳이 내가 살고 있는 호치민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었다. 또 비자문제 때문에 베트남에서 한 달쯤 지내다 보면 꼭 출국 후 재입국해야만 했다. 2주간 일본여행을 갔다 오기도 하고, 그의 고향 친구들의 방문으로 베트남 내 다른 도시로 떠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게 트여르크는 강렬한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가 만나지 않는 순간에는 그를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이 블로그가 아니었더라면 더더욱 그의 존재가 내 기억 속에서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팔찌를 차고 있던 그의 입장은 달랐나 보다. 우리가 떨어진 순간에도 매일 팔찌를 차고 있었고, 그는 다낭의 한 바닷가에서 팔찌를 찬 그의 손 사진과 함께 "I'm thinking about you. I hope you're thinking about me, too (나는 지금 너를 생각하고 있어. 너도 내 생각을 하길 바라며)."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I'm thinking about you. I hope you're thinking about me, too.
나는 지금 너를 생각하고 있어. 너도 내 생각을 하길 바라며


실제로 필자가 선물한 팔찌. 트여르크가 여행 중 보내준 사진



이 수단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적용하더라도 효력을 가질까 아니면 이것은 트여르크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까. 머릿속으로는 트여르크와의 의리를 저버리고 같은 팔찌를 여러 개 더 만들어 매직 트라이앵글의 다른 상대에게도 줘보고 싶었다. 사실 나는 매직 트라이앵글의 세 꼭짓점 중 트여르크와의 만남이 가장 시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의미로는 다른 이에게 더 강렬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 (다음 편에 나옵니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내 마음이 식어가기 시작한 포인트는 분명하다. 필자는 이 "사건"으로 인해 스스로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새로이 이해하게 됐고, "이것"에 대한 필자의 지향성이 상당히 흥미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사건"은 바로 그가 나와 함께 하는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고 내게 직접적으로 말해준 것이고, "이것"은 미래에 대한 상상/계획이다.








ENFJ에게 있어 계획을 하지 말라는 것은..


30m2 남짓 안 되는 나의 작은 호치민 원룸에서 190cm의 장신 트여르크가 들어와 가장 놀라워했던 것은 다름 아닌 달력 개수였다. 벽기둥에도, 탁자에도, 현관에도, 침대 머리에도 달력이 있었다. 그는 그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나 보다. 오죽하면 그는 일본 여행 중 한 문구점의 달력 코너에서 내 생각이 났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줬을 정도였다.





트여르크와의 만남에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내가 계획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고, 계획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뜻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난 편에서 트여르크와의 썸을 시작하며 어렴풋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강가를 따라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상상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상상으로 인해 트여르크와의 관계에 더 많은 애정을 가질 수 있었다.



책임감이 강한 트여르크는 내가 이런 성향이 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대화의 필요성을 직감했나 보다. 또 다른 여행에 나서기 직전, 그는 내 회사 앞까지 찾아와 나와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싶어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자리에 앉아 얘기를 했을 때 그가 말하는 것은 여러모로 내게 큰 혼란을 주었다. 그는 나와 함께 하는 미래를 볼 수 없다고 말했고, 지금으로서는 그저 서로 존중과 애정을 담아 현재의 순간들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도 본인이 호치민에 머무를 수 없는 날들이 잦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 또한 그와 결혼할 마음이 없다. 자연스럽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음이 깊어져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숫자로 따지자면 한 7%의 가능성 정도로만 보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반면 그는 그 7%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조차도 잘못됐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함께 하는 미래를 그리지 "못하겠다(can't)"가 아니라 그릴 수 "없다(don't)"고 말했다. 확신의 문장이었다.



이것은 트여르크와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MZ Love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연인이 하는 거의 모든 행위를 함께 하면서도 둘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남자친구/여자친구로 레이블링 (Labeling, 뜻: 이름을 붙이다) 하지 않는 것은 미래를 기약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시츄에이션십 관계에 있을 때 가장 전형적으로 듣는 말이 다음 대사다.


Let's not think about the future. Let's just enjoy our present moments together.
미래는 생각하지 말자. 그냥 지금 주어진 현재를 즐기자.



나 또한 그와의 미래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라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내가 어디가 모자라서? 원하면 네덜란드든 어디에서든 직업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인데? 의지만 있다면 지리적 요소는 문제가 되지 않을 사람인데? 그러나 직접 물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기준에서 나는 미래를 약속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려니 하고 생각하는 수밖에. 그러나 조금의 가능성도 열어두지 않고, 가차 없이 나의 매력과 나와의 미래를 단정해버리는 그의 모습, 그리고 계획형 인간으로서 미래를 상상했을 때 느끼는 기쁨을 중단해야 한다는 사실에 - 나의 애정은 짜게 식었다.



MZ Love 가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관계의 연속이라면 아마도 나는 MZ Love 를 할 수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필자는 10살 때부터 미래에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을 꿈꾸었고 그 꿈을 이룬 지금 나의 현재는 10살의 내가 미래를 계획하고 목표 삼았기 때문에 이뤄진 산물이라고 본다. 그때의 내가 미래를 꿈꾸지 않았더라면 지금 현재 내 성취는 없을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현재만 즐겨야 하는 관계가 불편하게 다가왔다. 또한 앞으로 어떤 삶을 꾸려야 행복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모색하지 않고서 주어진 것에만 만족해야 하는 삶이 습관화된다면 결국은 주어진 것에 만족할 수 없어도 애써 겉으로만 잘 살고 있는 척하는 루저(Loser)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을 이후에 또 만나게 된다 (프랑수아 편).








그럼에도 최장기간 유지되고 있는 썸, 그 비결은?


이런 생각이 들다 보니 필자는 그 이후로 그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재미없다고 생각한 만남이 더 의미 없어지는 꼴이었다. 그가 보내는 연락에도 의도치 않게 (마음이 없다 보니) 답변이 늦어지거나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잦아졌다. 이대로 그냥 자연스럽게 멀어져 만남이 중단됐으면 했다. 그러나 트여르크의 진가는 그가 직접적이고 소통형이라는 데에 있다. 그는 불편한 상황을 절대 어설프게 회피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을 만나보니 이 점이 굉장한 장점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그는 또다시 대화의 장을 먼저 열었고, 나는 솔직하게 그에게 이 모든 점을 공유했다. 그와 나의 관계가 "사귀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점도, 그 사람은 나와 더 깊이 있는 교류를 할 의향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는 점도, 또 그 사람과의 만남이 깊어지면서 트여르크와는 더 이상 육체적 교류를 하고 싶지 않다는 점까지도 모두 공유했다. 내가 이 얘기를 꺼냈을 때는 트여르크와의 만남이 끝이 날 것을 각오하고 말한 것이었다. 나의 솔직함은 내가 봐도 참 서툴렀다. 솔직한 것은 좋지만 불필요한 말도 너무 가리지 않고 많이 하지 않았나 싶었다. 뒤늦게 그런 생각에 빠져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니, 그는 그것이 나의 장점이라며 솔직하게 대답해 줘서 고맙다고 말해줬다. 그러고서는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며 굳이 육체적 교류를 갖지 않아도 좋다고, 내가 불편하지만 않다면 계속 만나고 싶다고 답해주었다.



그와의 만남보다 더 늦게 시작한 나머지 두 꼭짓점의 썸이 다 끝났음에도 필자는 아직도 그와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번 만남에서 그는 "너에게 계속 로맨틱한 감정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어. 너 또한 나에 대해 그러한지 아니면 친구로서만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지 알려줘"라고 말했다. 그는 항상 이렇게 남들이 선뜻 먼저 꺼내기 어려워하는 마음 고백을 당당하게 한다.







필자가 연인을 만날 때 진절머리 날 정도로 흔히 갖게 되는 문제가 Insecurity Issue 이다. 상대방의 자아가 불안정해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을 쉽게 느껴 갈등을 갖게 되는 상황으로, 전 세계 어디든 남녀노소 누구든 가질 수 있는 성향이지만! 안타깝게도 특히 국내에서.. 고학력자에 독립적이고 강한 멘탈의 여자를 상대로 만나는 남자들이 종종 그러한 성향을 띠는 듯하다. 그런 성향의 사람들은 주로 회피형으로 불편한 상황에 직면하기를 굉장히 꺼려한다. 고로 자신이 무시를 받거나 거절을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큰 나머지, 자기 마음속 약한 구석을 먼저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필자는 연애가 그런 불편한 상황을 직면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너도 나도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을 찾는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만족도를 얻으려는 심보다. 어느 정도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야 분명 있을 테고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물론 이상적일 것이다. 단, 나와 동일한 성향의 사람이 나타나길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인 욕심이다. 연애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하나의 길로 함께 가기 위해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 가는 과정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소통(Communication), 타협(Compromising)과 신뢰(Trust)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필자는 지금으로서는 더이상 결혼을 상상할 수 없지만 육체적 매력을 다 잃고 쭈글쭈글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함께 하기로 약속하는 두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노력과 고통은 감수할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애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하나의 길로 함께 가기 위해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 가는 과정이다.



위 사진은 영국 배우 샘 클래핀의 사진으로 실제 썸남과 느낌은 비슷하나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트여르크와 나는 그런 미래를 함께 그리고 있지 않지만, 그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언젠가는 영원을 약속할 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그러기 위해 소통을 습관화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참 강인하고 여유롭고 성숙해 보였다. 나 또한 그에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도 너를 이성으로 보고 로맨틱한 기류를 느끼고는 있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섹스를 하고 싶지 않아. 당분간은 그럴 예정이야. 감정적 평정심을 복구하기 위해 하는 셀프 수련기간이랄까? (아, 영어로 말할 땐 멀쩡하게 들렸는데 한국말로 번역하니 이상한 애 같네..)" 트여르크는 본인이 우리 사이에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로맨틱한 관계이지 섹스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고서 우리는 애정이 담긴 키스를 나누었다.


여기서 포인트! 모든 MZ Love 또는 시츄에이션십 추구자가 육체적 쾌락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를 기약하지 않는 사이다 보니 의미부여와 감정교류를 최소화하고 육체적 쾌락을 주된 목적으로 여기는 것이 이 연애방식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잘못된 일반화였다.



트여르크는 육체적 쾌락보다도 애정이 담긴 제스처를 주고받고,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연락을 자주 하고, 함께 맛집을 가거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더 자주 있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이 부분이 여전히 내게는 미지의 세계이다. 풀이되지 않는 공식이다. 그렇게 추억이 될만한 교류를 많이 하고 관계가 끊어지면 미래가 더 괴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왜 책임질 수 없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거지? 트여르크는 캐주얼한 관계를 원했으나 캐주얼한 관계 가볍고 얕은 교류라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캐주얼한 관계에서도 깊은 교류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시츄에이션십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을 성립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읽고 있지만 트여르크에 의하면 모든 시츄에이션십은 "사바사" 즉,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트여르크가 추구하는 연애방식은 여전히 내 연구대상이다. 여건이 된다면 매직 트라이앵글의 나머지 두 꼭짓점 헤먼트와 프랑수아의 이야기 그 후 또다시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다음 이야기는 어른스러운 트여르크와는 정반대로 철없고 천방지축이지만 마성의 매력을 갖고 있는 인도계 영국남자 헤먼트(브리저튼 남주와 유사한 그!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 사랑을 느꼈던 그!)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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