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서 만난 친구
어느 봄날.
바다를 향해 차를 몰고 달렸다.
가족 공동체로부터 모처럼 해방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스트레스가 삶의 질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기 직전이었다.
어떻게든 털어내야 나머지 삶을 살 것 같았다.
도로는 뻥 뚫렸다.
창문을 열자 푸릇한 풍광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좋다.
바람만으로도 이렇게 좋은 걸 바보처럼 놓치고 살았었구나.
뭐든 마음먹기 나름인데도 하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무기력증에 갇혔었다.
사람들과 부닥쳐 있는 시간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언제부턴가 오롯이 나로 살고 싶었다.
그냥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를 일방적으로 깨트릴 수도 분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함께 가야 한다는 거, 힘들지만 인정해야 했다.
와, 드디어 바다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속초의 푸른 바다.
답답증이 해소되는 듯 편안했다.
수평선을 향해 멍 때리고 있던 나에게 땡을 외치는 전화벨이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이랑아, 어쩐 일이야?"
"그냥 사는 게 궁금해서 전화했지."
"그랬구나. 넌 별일 없지?"
"뭐 그냥 그렇지. 넌 지금 어디니?"
"나 속초에 왔어. 방금."
"속초? 우리 동네잖아."
"맞다, 너의 남편 직장 때문에 아예 속초로 이사 갔었지."
"지금 나 혼자 있는데 우리 집으로 올래?"
"음, 생각 좀 해보고 연락 줄게."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와 통화가 끝났다.
고등학교 때 단짝이긴 했으나 변덕이 심한 관계로 관계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만나면 반갑고 기쁠 텐데 내 마음이 쉽게 움직이질 않았다.
바닷가를 좀 걸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요즘 부쩍 관계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인간관계 유지를 끝까지 잘하고 싶지만, 만날 때마다 피로감이 쌓인다면 굳이 그 상대방을 만나야 할까.
나는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상대방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이랑이한테 전화를 했다.
"이랑아 나 지금 가도 돼?"
"그럼 당연하지. 어서 와."
"내가 가면 불편하지 않겠니?"
"우린 친구잖아. 불편해할 거 없어."
"알았어, 금방 갈게. 집 주소 좀 알려줘."
통화가 끝나고 차를 몰고 이동했다.
이랑이네 집은 바다가 잘 보이고 마당이 있는 단독 주택이었다.
마중 나온 이랑이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봄날의 오후 햇살이 거실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아늑하고 포근했다.
딸기를 꺼내 온 이랑이가 말을 꺼냈다.
"그동안 내가 좀 변덕스러웠잖아. 생각해 보니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서였던 거 같아. 그런데 속초로 이사 온 후 만만하던 변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
"정말?"
나는 믿기지 않았다.
이랑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서울에 살 땐 주변 건물 때문에 햇살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거든."
"맞아. 그럴 수 있지."
"어느 날 알게 됐어.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나의 낮은 자존감을 가만히 어루만지고 있었다는 걸."
"어머 그랬구나."
"다행히 나의 변덕은 그때부터 조금씩 회복되었고 마음이 평온해졌어."
"방이랑, 너 정말 멋지다."
"멋지긴, 그냥 마음이 편안하니까 사람답게 살고 싶더라. 이제부터라도."
"왠지 속초 햇살이 치유의 능력이 있는 거 같은데."
"으하하 얘는 별소리를 다 하네."
수다로 인해 이랑이와 나의 관계가 좀 더 친밀해졌다.
이랑이네 거실에 스며든 햇살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내 생각과 마음에도 생기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