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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엔에프제이 Nov 20. 2023

창가에 서 있는 청년

태안 여행 중에 만난 청년

나는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대충 짐정리를 하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어 산책을 했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오늘의 마지막 햇살의 조화가 나의 기분을 업그레이드하는 듯했다. 

철썩거린 파도 소리를 발끝에서 들어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머물수록 행복해진 느낌이었다. 

딱 이만큼의 행복이라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이 작은 행복만으로도 문제없이 살아낼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언제 어느 때 또 변덕이 아우성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산책이 끝나고 숙소로 들어가려는데 목에 두른 스카프가 날리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거 같아 약간 불쾌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한겨울도 아닌데 뭔가 오싹했지만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얼핏 보인 축 처진 어깨와 가끔씩 고개를 내밀어 바닥을 확인하는 거 같은 행동 때문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하늘을 보는 척하면서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맙소사, 바로 나의 옆방이었다.


나는 라면이 먹고 싶어 편의점으로 갔다. 

표정이 없는 한 청년이 계산을 하고 있었다. 

청년도 컵라면 한 개를 샀다. 

내가 계산을 하고 나와 오른쪽으로 갔더니 우연찮게 청년을 따라가는 거 같았다. 

문득 아까 창가에 서 있던 그 청년이 아닐까 싶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내가 물었다.

“저기요, 괜찮으시다면 휴게실에서 라면 같이 드실래요?”

“네? 저랑요?”

청년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내가 말을 이었다.

"청년이 심심할까 봐 같이 먹자고 한 거예요."

“뭐 상관없긴 해요, 근데 아줌마는 누구세요? 원래 아무한테나 그렇게 말 걸고 그래요? "

“아무한테는 아니고요, 감이 오는 사람만요.”

“어떤 감이요?”

“이를테면 운빨이 없어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거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느껴질 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냥 세상이 싫어질 때 차라리 죽어버릴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 덩어리들이 보이거든요.”

“그게 어떻게 보여요?”

“제 눈엔 그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보이더라고요. 대화가 필요함을 감지한 거죠.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죽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도 진짜로 죽지는 마세요. 청년이 죽어도 세상은 기분 나쁠 정도로 잘 돌아갈 거거든요. 더럽게 재미없는 세상일지라도 청년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이유인 가족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저 같은 사람 누가 기억이나 할까 싶네요.”

“당연히 있고 말고요. 혹시 여기 오기 전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면 해도 돼요. 물론 억지로 할 필요는 없고요. 아무 말 안 해도 괜찮아요.”

“네에.”

내 얘기가 끝나자 청년의 긴 호흡과 동시에 대화가 중단되고 침묵이 흘렀다. 

나는 좀 더 기다려 주었다.


더는 할 얘기가 없는 듯하여 일어서려는데 청년이 말했다.

“실은 제가 명문대 졸업을 했는데 취업이 잘 안돼 죽고만 싶었어요. 자존심도 상하고 이젠 의욕도 없어요.”

“에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좌절과 낙심이 컸겠네요. 그럼 마음 다스리려고 혼자 여행을 온 건가요?"

“아니요. 이번 여행 후 죽으려고 했거든요. 근데 아줌마를 보니까 왠지 살고 싶어 졌어요.”

“잘했어요. 그럼 제가 청년한테 말 잘 걸은 거네요. 적당한 타이밍에."

“네 맞아요. 이상하게 아줌마랑 대화하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저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암요, 청년은 살아갈 동안 더 좋은 방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고 말고요. 이제 스물아홉이니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근데 제가 면접 때마다 뭔지 모를 두려움과 자신감이 부족했던 거 같아요. 빨리 취업하고 싶단 마음만 앞서 차분하지 못하고 실수를 많이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다 떨어졌죠.”

“많이 속상했겠네요. 이제부턴 조급함도 버리고 다른 사람들 시선 따위도 무시하고 청년이 좋아하는 일에 도전하면 어떨까 싶네요. 어떤 일을 하든지 본인의 행복도가 상승하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길 거 같거든요. 제가 응원할게요, 여행이 끝난 후 다시 도전해 봐요."

“그래야겠어요, 아줌마 감사합니다.”

"힘내요, 멋진 청년."

청년과의 대화가 끝났다.


솔직히 난 아줌마란 호칭을 들으면 왠지 어색하고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 태안 여행 중 우연히 한 청년을 만나면서 내가 대한민국 아줌마였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아줌마의 하루 일정이 끝났다.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커튼을 젖히자 아침 햇살이 방긋 나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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