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좀 살 것 같아
평일 늦은 오후.
숙소의 주차장은 약간 오르막길을 지나 한적한 곳에 있었다.
시동을 끄고 운전석 문을 열자 싱그러운 꽃향기가 나를 반겼다.
캐리어를 끌고 들어가려는데 맨살 같은 촉촉한 흙 내음이 갈라진 내 마음 안으로 쏙 들어와 기를 북돋웠다.
정원이 있는 숙소와 이웃하고 있는 작은 성당의 뜰도 평화로웠다.
나는 마음이 언짢을 때마다 종종 이곳에 들렀다.
소담스러운 꽃들이 무리 지어진 좁은 골목길을 따라 산책하는 게 좋았다.
답답증이 해소되는 거 같고 뭔가에 쫓기던 시간도 여유를 찾는 느낌이랄까.
꽉 막힌 도로에서 비교적 한산한 우회도로를 발견한 것처럼 설렜다.
짓눌렸던 가슴이 뱉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나의 팔랑 귀가 일하던 것을 제지하지 못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같이 공부를 하자는 말에 대책 없이 승낙을 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평생 사는 날 동안 결코 써먹지 못할 거 같은 자격증이었다.
마음이 영 불편했다.
그냥 안 하겠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나는,
평소에 약속 번복한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이해와 용납이 되지 않았고 그런 상대방을 더는 신뢰할 수 없었다.
신중하지 못하고 경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약속을 번복해야 할 상황이 생기다 보니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더는 나를 신뢰하지 않을 거 같은 불안함에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얼굴도 화끈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끌려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에 용기를 냈다.
나를 위해 나의 평안을 위해 나의 행복을 위해 취소 버튼을 클릭한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휴, 오랜만에 평온함이 주는 위로에 빠졌다.
나는 숙소에 딸린 정원 앞 벤치에 앉았다.
활짝 핀 노란 해바라기를 멍 때리며 바라보는 사이로 어느새 어둠이 스며들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해바라기 닮은 동그란 햇살이 반겨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