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책임감의 무게

by 고정문

어떤 어른들은 요즘 젊은것들이 책임감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신입사원이 일하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경우는 없다.

모두 처음 맡은 일을 잘 해내기 위해 고민하고, 자신이 하는 행동이 틀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입사 초기, 처음 회사에서 물건을 구입하며 계약을 타던 때가 떠오른다. 서류가 누락된 것은 없는지, 절차대로 잘하고 있는 것인지 걱정이 되어, 고작 50만 원 치 복사용지를 사는데도 덜덜 떨었던 나.


이것이 총액계약인가? 단가계약인가? 하나하나 찾아보면서 결의를 작성한다. 몇 가지 선택사항을 클릭하고, 글자 몇 자 쓰는 일이 신입사원에게는 고된 문제풀이다.


하나하나 선배가 가르쳐주는 경우는 아주 운이 좋은 경우다. 대개 바쁜 선배들에게 가서 여기서 무엇을 클릭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동기 단톡방을 빌려 동기들에게 도움을 구해보지만, 다들 제살기 바쁘다. 가끔씩 이렇게 해~라고 말하는 동기의 말을 듣기엔 그다지 신뢰가 안 간다. 그냥 다시 알아보거나 선배의 도움을 빌려 어렵사리 해내는 수밖에.


원인행위, 계약결의, 검사검수의 시간을 거칠 때마다, 내가 실수한 것은 없는지, 연말 지출기한을 넘기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한다. 혹시 내가 잘못한 건 없을까 싶어 아침에도 눈을 번쩍 뜨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결의내용을 확인해보곤 했다. 단돈 50만 원짜리 계약이었다.


진급한 이후로는 1억, 2억을 턱턱 통장에 입금해주는 보조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50만 원짜리 계약보다 두려운 마음이 덜했다. 그냥 정해진대로 툭툭, 지출결의를 올린다. 이전보다 배짱이 커졌나 보다. 이게 성장일까, 매너리즘일까.


그런 한편으로, 점점 더 큰일이 내게 생기기도 한다. 갑자기 납기를 지키지 못하겠다는 연락, 절차를 지키지 않아 법적 문제까지 가는 경우도 생긴다. 내게 피해가 오는 것은 아니나, 업무가 원활히 처리되지 않으니 스트레스를 받는다. 책임감의 무게다.


이런 스트레스가 지속되다 보면, 회사 자체에 대한 회의감도 든다. 왜 이렇게 회사에 체계가 없는가 하는 의문, 체계만 잘 잡혀있어도 내가 이렇게 고민을 안 할 텐데 싶은 불만. 내게 너무나 과중한 책임이 부여된 것에 대한 스트레스.


B 팀장님은 내게 말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받는 값으로, 월급을 받는 거야. 스트레스 안 받을 수가 없는 게 회사인거지."


맞는 말이다. 업무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월급값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만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렇게 업무적인 스트레스를 통해, 우리는 성장하고 있는 것일 터다. 그렇게 점점 더 큰 배포가 생기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젠 그 책임감을 내려놓고 싶다. 앞으로 주어질 책임의 무게가, 그 성장이 반갑지가 않다. 나는 더 이상 내 일을 사랑하지 않게 됐나 보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서 책임을 느끼고, 그로부터 성장하고 싶어졌다. 텅 빈 성장이 아닌.

keyword
이전 03화월급으로 치료되지 않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