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에 처음 들어와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부적절한 관행이다. 선결제와 같은 공금의 사적유용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사할 때, 면접관이 "부당한 일을 목격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하고 물을 때, 나는 "동료, 상사와 상의하여 적법한 절차로 진행될 수 있도록 행동하겠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입사 후 나는, 단 한 번의 저항도 없이 암묵적인 관행을 따랐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 신념대로, 내 고집대로 사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고, 그런 용기가 내게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좌절의 과정이 사회생활인가. 이는 내게 손해가 되는 일이 생겨도 마찬가지다.
인사고과 시즌이 되면, 팀장님들은 팀원을 한 명씩 불러다 말한다. "섭섭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아직 OO씨는 승진 때가 아니니, 직급별로 평가점수를 줄 거예요. 곧 XX대리가 승진해야 하니, 다면평가점수도 잘 챙겨주세요."
승진하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라고는 하지만, 개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치하해주려는 고민 없이 선배에게 양보하라 한다. 분명 팀에서 일을 제일 열심히, 제일 많이, 제일 잘 한 사람이라도, 막내라면 점수는 최하위 점수다.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묵인한다.
이렇듯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누가 좋은 건지 모를 문화가 확산되어있다 보니, 일 자체를 하지 않는 직원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나 일 안 해!' 하며 출퇴근 도장만 찍고 회사에서 본인 취미생활이나 하며 사는 진정한 월급루팡. 아니 월급강도들이 있다.
공공기관이라 더군다나 잘리지 않으니, 인사팀도, 부서장도 서로 언성 몇 번 높이는 것 외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우습다. 누군가는 며칠 밤을 야근하고, 건강을 잃어갈 때,, 누군가는 '인성에 문제가 있어버린' 덕분에 평생 일 걱정 월급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지만 묵인한다.
나는 회사를 다니는 내내 묵인하는 사람이었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 바로잡아야 할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대충 묻어둔 동그란 양심이 자꾸 세모가 되어 나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