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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주제로 심리상담을 받았다.

by 고정문

진단서가 나올 만큼 어디가 힘든 것도, 잠이 안 오는 것도 아니었다. 건강검진결과도 좋았고, 스트레스 수치도 정상범주이고, 음식은 오히려 더 잘 먹었다. 회사에서 업무적 대화도 곧잘 했고, 실수가 종종 있었어도 업무는 잘 해냈다.


나는 객관적으로 이리도 멀쩡한데, 주관적으로 아파졌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슴이 쿵쿵 뛰고, 회사가 소름 끼치게 가기 싫은 날들이 생겼다. 사무실 자리에 앉아있으면 누가 말을 걸지 않아줬으면 하는 심란한 날들이 쌓여, 언제 퇴사하지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회사에서 마침 전문가 심리상담을 지원해 준다기에, 곧장 화상상담을 신청했다. 퇴근 후 밤 9시, 집에서 상담을 받았다.


상담선생님이 물었다.

"상담을 신청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음.. 회사에서 퇴사를 고민 중이에요. 그리고 출근생각만 하면 가슴이 쿵쿵 뛰고, 사무실에서도 한 번씩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불안해요."


상담선생님을 따라 하나씩 하나씩 나의 회사생활을 돌아봤다.

집에 와서는 결코 돌이켜보지 않았던 회사 일을 하나하나 곱씹는 경험이었다. 내 사람들이라 여겨 스스로도 쉽게 비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사람들, 동료들이 내 불안의 주범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회사사람들이 저를 너무 많이 찾아요. 선배의 일도 후배의 일도 다 저한테 물어봐요. 가끔 보면 하소연도 다 저한테 하는 것 같고, 저 힘든지는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고..."


"OO 씨가 이렇게 힘들어한다는 걸 주변에 표현해 본 적이 있나요?"


".... 잘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제 일이 어느 정도 괜찮을 때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좋은데, 제 일이 힘든데도 자꾸 도와달라고 하니까 힘든 것 같아요. 이제 와서 거절할 수도 없고.."


"왜 거절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머리를 탕 치는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같은 고민프로그램에서나 보던 '거절 못하는 사람', '남 눈치만 보는 사람'이 나였다니...


회사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기쁘게 여겼던 나다. 20명이 넘는 부서원 한 명 한 명과 그렇게라도 대화하고 친밀감을 쌓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내 일이 점점 쌓이고 바빠지자, 이제 '관리'라는 걸 해야 하는 단계가 되었었나 보다. 쳐낼 건 쳐내고, 어려운 건 어렵다고, 힘든 건 힘들다고 말했어야 했나 보다.(물론 그랬다고 일이 과연 줄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업무를 어느 정도 거절하고, 위임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나의 역할이었다. 나는 그걸 능숙하게 잘 해내지 못해서 혼자 그리 힘들었다는 걸 알았다.


결국 나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일을 미뤄', '뻔히 옆에 이렇게 힘든데 저렇게 퇴근하는 거야?'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처럼 되어야 했다는 걸. 그게 '나쁜 사람'이라면, 난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할 타이밍에 나쁜 사람이 되지 못해서 힘들었다는 걸 알았다.


상담을 마치고 출근을 한 날, 괜스레 사람들에게 틱틱거리며 하루를 보냈다. 왜인지 조금은 나를 덜 찾는 것 같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다.


전쟁터처럼 서로 힘든 일을 위임하고(미루고), '나 힘들다' 인상 쓰고, 주변에서 힘들어보여도 말 붙이지 않으며, 자기 할 일만 딱 끝내고 퇴근하는 것이 회사라면, 나는 단단히 잘못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을 통해 회사에서의 문제가 딱히 해결되지도, 퇴사에 대한 마음이 지워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문제가 무엇이고, 내가 찾는 유토피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그림이 조금은 그려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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