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였던 곳)는 연초가 되면 정기 인사발령이 난다. 순환근무라는 공기업 특성상, 정기 인사발령은 대규모로 일어난다. 그러다 보니 대대적인 업무분장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지사. 이 말인즉슨, 인사발령이 난 직원과 안 난 직원 모두에게 '업무를 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연말연시가 되면, 대다수 직원들이 부서장과 팀장에게 직접 업무조정을 요구하러 찾아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른다. 직원들은 온갖 병명, 지금까지의 이력을 구구절절 외면서 지금 일이 너무 힘들다 하소연을 한다. 이 일을 하다간 죽겠으니 차라리 이 부서에서 내쫓아달라, 자신의 적성 상 이 일을 하고 싶으니 업무를 바꿔달라. 온갖 조공과 물밑작업이 곁들여진다.
이렇게 회사에서 분분하게 일어나는 정쟁이 크나큰 영향을 줄 거라 믿지 않았던, 순수했던 지난날의 나는 그저 '윗 분들이 알아서 적당한 업무를 배분해 주겠지, 죽게 내버려 두시겠나.'라는 생각으로 멀뚱멀뚱 가만히 있었더랬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공유된 업무분장표에는 작년에 세 사람이 했던 사업 세 개가 모두 내 업무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부서장도, 이 업무분장표를 쓰던 사람도, 이 표를 다 같이 읽고 있는 이 모든 사람들도 다 별 생각이 없었다. '고 대리가 알아서 하겠지.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인 듯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겐 혼자 3인분의 일을 시켜놓고, 누구는 한 사업을 몇 명이 들러붙어한다. 누가 봐도 불합리한 상황이었다. 한 발 늦었지만, 강력하게 항의했다.
"팀장님, 우리 절대 이 업무대로는 못 합니다. 절대 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닙니다. 한다 해도 사업이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못하겠다 소리 잘 안 하는 내가 이렇게 항의하면 다시 합리적으로 생각해 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업무분장 권한을 가진 옆팀 팀장은 '고 대리, 그렇게 안 봤는데..'하고 비꼴 뿐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부서장의 리더십 부재인지, 나의 한계인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것은, 연초의 그 업무분장으로 인해 부서 내 분열이 심각해졌고, 나의 애사심이나 회사에 대한 신뢰가 밑바닥을 쳤다는 사실이다.
그날의 내가 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떤 선배는 내게 '너는 좀 삐대고 힘든 척을 해야 해. 못하겠다고 징징거려!'라고 했다. 정녕 투덜거리는 것이 답이었을까.
맞다. 돌아보면, '저 너무 힘듭니다.'라고 내내 하소연하는 것이 방법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못하겠어요'라는 말이 익숙하지 못한, 거절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에, 주어진 일을 못한다고 말해서 인정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었다.
또 한편으론, 모두가 '나 힘들어요. 열외 해주세요.' 하는 조직이 옳을까 하는 고민도 들었다. 다들 자기가 힘들다는데. 어느 정도까지 힘들어도 되고, 어느 정도까지 힘들면 안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결국 내가 징징거려서 피해를 보는 것은 다른 조직원일 것이다.
1년 내내 정시퇴근은 개나 줘가며 내가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었을지를 고민했다. 그저 일을 사랑해보려고도 노력했다. 그리고 결국 얻어낸 답은 '모든 게 다 내 욕심이구나'라는 것이다. 잘하고도 싶은데, 그러려면 힘들어야 하고, 힘들긴 싫고, 싫은 소리는 못하겠고, 망쳐버리긴 싫고, 이래도 불편하고, 저래도 불편하고...
내가 힘들기 싫으면 도움을 청하는 것, 그로 인한 위험(미움을 받거나, 남들이 힘들어지거나, 일이 더 복잡해지거나.)을 감수하는 것. 그게 싫으면 주어진 것을 감당하는 것. 그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이도 저도 싫으니 그런 내가 문제인 거다.
그렇게 이도 저도 못하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그 시간 동안 점점 회사에서 방어적이고 소극적으로 변해가는 나, 선의로 다가오는 사람들조차도 경계하는 나를 발견했다. 일에도 애정이 떨어져, 출근이 괴로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냥 퇴사하기로 했다. 최소한 '나', '내가 하는 일', 그리고 '내가 속한 조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지금으로선 나도, 일도, 조직도 바꿀 도리가 없어서. 남들과의 일 미루기 싸움에 참전하고 싶지도 않고, 그 일을 다 감당할 자신도 없어서, 절이 싫은 중이 퇴사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