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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퇴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by 고정문


의원면직, 즉 자발적 퇴사는 자유인지라, 언제든 사직서만 내면 퇴사할 수 있다.

하지만, 사직서를 냈다간 남은 사람들에게 독박을 쓰라는 말과 같다. 인사발령이 자유롭지 않고, 대체인력을 뽑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뜸 업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라도 퇴사를, 휴직을 선언하면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우리 회사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나가는 사람은 책임이 없으니.

그러나 그렇게 한 사람이 쏙 빠지고 나면, 그 업무는 고스란히 옆사람에게 넘어가, 한 사람이 2인분의 일을 하게 된다. 그걸 꾹 참고 해내면 인원을 충원해 주기보다는 한 사람이 2인분을 하게끔 업무분장이 고착된다.


나는 4년 간 이런 모습을 많이 목격했고, 당했고, 그 때문에 남은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악순환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2월 말에 퇴사하기로 결정했다. 인사발령이 날 때 즈음 퇴사를 하면, 최소한 업무공백으로 인한 민폐는 끼치지 않겠다 싶었다.


안타깝게도, 인사발령은 12월 말이 아닌 1월 초에 나게 되어, 나는 어쩔 수 없는 2주간의 업무공백을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수인계서라도 더 꼼꼼하게 작성해서 넘기기로 하고, 20여 장의 인수인계서를 야근해 가며 만들었다. 넘길 파일도 20기가가 넘었다.


퇴사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일을 팽개쳐두고 인사하러 다닌다는데, 나는 주변을 챙길 새도 없이 남은 일을 마무리하고, 인수인계자료를 완성했다. 짐을 빼는 날까지도 요청자료를 작성하느라 야근을 했다.


마무리가 되어갈 즈음, 실장님께 인수인계 내용을 보고 드리러 가니, 실장님께선 '남은 휴가 소진 기간 동안은 어쨌든 회사 사람이니, 당분간은 업무연락 잘 받아라.'라는 말만 남기셨다.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조직에 피해가 안 가게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나가는 나의 사정보다는 남아있는 자기의 사정이 더 중요할 뿐이구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난 그냥 도구로, 부품으로 다루어질 뿐이구나.


물론 퇴사일의 결정도, 꼼꼼한 인수인계도, 마지막까지의 야근도, 누군가 강제로 시켜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마지막 남은 책임을 다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오래 맡았던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고 가고 싶어서 그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의 노력을, 나의 힘듦을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이 없지 않았나 보다. 퇴사하는 와중에도 회사를 생각했던 내 마음이 쓸데없는 내 욕심이었나 계속 돌아보게 됐다.


그러던 중, '먼저 퇴사해서 죄송하다'라는 내 마지막 인사말에 돌아온 모 선배님의 한 마디가 영영 위로가 되었다.

"피해 안 주려고 마지막까지 마무리하고 가는데, 뭘 미안해요.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그래도, 나 잘한 건가 보다.

이렇게 쉽게 얼었던 마음이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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