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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새꽃 Dec 27. 2024

마음의 병

차별대우

 


둘째 돌잔치를 집 근처 몇 분 거리에서 했는데 시아버님이 안 오신다고 선언을 하셨다. 그런가 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집이 센 분이라 누가 말리겠는가?


돌잔치 사진을 다 찍고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갑자기 안 오신다던 시아버지가 장사하시던 옷차림으로 오셔서 식사를 하시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크게 생각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난 한이 맺힌다는 것이 그런 거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돌잔치가 끝나고 얼마 후에 증조부님의 제사가 있었다. 아버지 제사와 겹치는데 그때는 겹치지 않아 아버지 제사에 참석하고 집에 오는 사이에 딸이 장염에 걸리고 말았다. 먹여야 된다 먹이지 말라 실랑이를 하는 사이 탈수가 와서 안고 밥을 먹는데 사지가 돌아가고 눈도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겁이 나서 119를 부르는 사이 시어머니는 무당집으로 딸을 데리고 가시는 것이다. 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119를 타고 소아전문병원에 갔는데 그곳에서도 경기가 심해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는데 또 경기를 하니 심각하다고 느낀 의사가 뇌수막염 아니면 간질이라고 말을 하며 골수 채취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아이의 척추에서 골수를 뺀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던지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검사를 시작하는데 간이 조마조마 홀로 떨고 있었다. 검사결과는 탈수였다. 다행이라 여기며 1주일을 입원하고 퇴원해서 돌아오니 집안에 퇴마의식을 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단지 장염으로 인한 탈수였는데 제사를 잘못 보고 와서 거리귀신이 붙어왔다고 퇴마를 한 것이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또 하나의 한을 가슴에 안아야 했다. 그 후로 난 한 번도 아버지 제사가 가지 않았다.


시동생이 결혼하고 첫 집안 행사가 시아버지 환갑이었다. 계를 들어놓은 것이 있어서 아버님 옷을 백화점에서 사고 가족끼리 밥을 먹기로 했는데 까먹고 아침에 오지 않은 것이다. 음식 장만을 다 해놓고 제때 와서 먹기만 하면 됐는데

오도 가도 않는 시동생 부부. 시부모님은 아무 소리 하지 않으시고 그래 잘 왔다 하시는 거다. 큰 며느리가 그랬으면 그냥 넘어갔을까 싶다.

시동생 부부는 늘 손님이었고 난 대접해야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렴 괜찮다 그럴 수 있지 하며 넘겼는데 시동생이 아들을 낳으면서 180도로 변하는 시어른들. 차별대우 시작이었다. 아들 낳았다는 소식에 퇴원하는 날 시어머님이 가셔서 데리고 친정에 데려다주고 미역에 병원비 쌀, 기저귀 분유까지 사서 가시는 것이다. 난 집 근처에서 낳는데 들여다보지도 않고 나 혼자 애를 데리고 집에 왔는데 손자라고 낳자마자 차별이라니 기가 막혔다. 그럴 수 있지 난 대를 잇지 못했으니 그러고 넘어갔는데 난 천 기저귀를 쓰고 분유도 먹이지 못해 애를 먹였는데 매달 기저귀 한 박스 분유 한 박스 사서 보내는 것이다.


늘 하는 말이 이 집안의 핏줄은 손자라고 대놓고 내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하는 소리를 매일 들어야만 했다.


아들이 그리 중요한가? 난 아들을 낳지 않고 두 딸만 이쁘게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쌀장사를 하며 무거운 것을 들다 보니 임신한 줄도 모르고 있다 유산도 되었는데 아무도 몰랐다. 그 상태에서도 난 살림과 육아 모두 해내야 했다.


시댁을 원수라고 여기게 된 계기가 있다. 손자 돌잔치 때 일어났다. 광화문에서 돌잔치를 하는데

정장차림의 옷을 입고 돌잔치에 간다고 나왔는데 쌍욕을 하는 것이다. 누가 큰엄마가 돼 가지고 옷을 그렇게 입냐고 무식하다고 배운 게 없다 하시면서 무조건 한복을 입으라고 개난리라 어쩔 수 없이 입고 갔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을까.

더 웃긴 것은 시아버지도 가신다고 나 먼저 오라고 하는 것이다. 당신은 몇 분 거리도 오지 않는다 하시고 작업복 차림으로 와 놓고선 정장차림으로 택시까지 타고 가시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 친구분과 택시를 타고 오면서 하소연을 했더니 그 소리가 어머니 귀에 들어가서 하는 소리 나 때문에 형제 의리 상한다고 나가라는 것이다. 어디서 개소리를 또 하는가 싶었다.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 것이다.


세상에 조선시대도 아니고 성 차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일상에서 들어야 했다. 남편이 지방에 있으니 따라갈 수도 없는 상태인데 1년 2년 근무하면 가겠지만 6개월 또 몇 개월인데 어찌 따라다닌단 말인가.

울며 겨자 먹기로 함께 살았다.


무던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내 마음은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왔다. 큰딸이 5살 때 시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시면서 나의 병도 수면 위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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