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을 함께 살면서 가족이 함께 외식을 해 본 적이 없다. 오로지 삼시세끼 집에서 해서 먹었다.
시할머니께서는 살아생전 당신이 직접 물건을 사 보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시다고 했다. 어릴 때는 양녀로 들어가서 울타리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고 하셨다. 아이들이 놀면 집안에서 바라만 보고 사셨고, 결혼해서는 시어머니, 남편이 사다 주셔서 장을 보신 적이 없다. 그저 장을 봤다 주면 상을 차리는 것만 하셨다. 평생 쪽진 머리를 하고 사셨고, 친구 하나 없이 새장 속의 새처럼 사신 분이다.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시고 딸을 낳았지만 먼저 보내야만 하셨다. 그 후로 아기를 낳지 못하고 아들 하나만을 키우고 사신 분이다. 여행 한번 나들이 외식 한번 안 하시고 평생 시어머니 아들 며느리 그늘 속에서 사시다 나랑 증손녀들과 6년을 사시고 떠나셨다.
할머니는 진짜 집에서 100미터도 나가지 않으시고 오로지 집안과 가게에만 맴돌다 가신 분이다.
유일하게 나를 찾으러 나오셨을 때가 가장 멀리 나오신 거다 시부모님의 싸움으로 중간에 낀 며느리도 쫓겨나기 일쑤였다. 쌀가게를 하기에 가게를 봐야 하는데 시어머니는 도망 나가시고 아버님이 주무시면
나를 찾아 재래시장으로 나오시곤 하셨다. 집 근처에 쫓겨나 있다 할머니가 찾으러 나오시면 못 이기는 척하고 들어와서 가게를 보고 쌀배달도 다녔다.
성격들이 장난 아닌 시부모님 툭하고 싸우면 어머니는 나가셔서 며칠을 안 들어오거나 2층에서 잠을 주무시고 동네 친구분에게 있다 들어오시곤 했다.
그 사이 난 딸 둘을 데리고 밥상을 차리고 집안일과 가게를 보아야 했고, 할머니의 잔소리 시아버지의 성질까지 받아들여야만 했다.
시아버지의 외출은 경조사가 포항에 있을 때 첫차를 타고 늦은 저녁에 오시는 게 다였다. 주무시고 오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휴게소에서 손녀들을 위해 사 오시는 게 호두과자였다. 다른 것은 사실 줄 모르는 분이셨다. 시어머니가 입덧을 할 때도 항상 같은 것만 사다 주셨다고 하니 유도로가 참 없으셨다. 무조건 당신하고 싶은데로 하시고 사셨으니 말이다.
독자로 자랐으니 얼마나 귀하게 자랐겠는가 늘 사대가 살던 집안이고, 시어머니는 10남매의 칠곱째로 가족에게 치이는 게 싫어서 단출한 독자에게 시집을 오셨다 했다. 시아버지는 외동으로 자라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랐지만 학교생활은 뒷전이고 주먹을 쓰는 세계에서 놀았다고 했다. 어머니와 결혼 후에도 경찰서를 들락거리고 경찰에 쫓기는 도피생활도 하셨다고 들었다. 아들 셋을 낳고도 사람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경찰서를 집처럼 다니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생활력도 강하시고 교육열도 강해 치맛바람도 부리며 사셨다고 하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대단하다는 생각뿐이다. 그런 집안에 시집온 나는 산골에서 자라고 일찍 아버지를 떠나고 그 그리움이 커서 선택한 사람이 남편이다. 행복을 바라며 시작한 결혼은 나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시어머니는 아들 셋을 낳고 당당하게 어깨에 힘을 주고 사셔서 친척들에게는 기세등등하게 대우를 받았다고 했다. 그와 반대로 부부 사이에서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지만 스스로 사는 방법을 터득하셔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사셨다. 집안을 전부 손에 쥐고 흔드셨다.
시어머니는 큰 물에서 살았던 셈이고 시아버지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신 것이다. 힘 겨루기를 하시며 살아생전 싸우며 사신 것이다.
남편에게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물어보았을 때 없다고 해서 안타까웠다. 늘 싸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전부였기에 남들과 아내와 아들들과 싸우며 산 세월
추억도 없게 만든 아버지 그리고 아들 참 불쌍하다.
할머니 시아버지 그리고 남편까지 집이 최고이고 전부라고 여기며 산 사람들 속에 나마저 따라 살아온 셈이다.
분가하기 전에는 허락받기 싫어서 외출을 많이 하지 못했다. 겨우 동네 친구랑 아이들 데리고 고궁 박물관 그런 곳과 남편이 지방에 있을 때 올라오지 못하면 내려가는 정도였다.
시어머니는 싸우는 한이 있어도 계모임에서 가는 여행은 매년 다니셨고 나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간 적도 많다. 안 보여서 물으면 시할머니도 시아버지도 모르시고 동네에 나가서 듣고 동서에게서 들어야 했다.
함께 사는 며느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알려주면 못 가게 할까 말도 안 하고 갔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집에서의 생활이 많았던 나 또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출을 자제하는 삶을 살고 있다. 분가하면 마음대로 돌아다닐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오로지 집에서 남편만을 기다리는 집순이로 살고 있었다. 남편과 따로 산 시간이 많았기에 나의 전부는 아이들이었고 집이었다. 겨우 내가 누렸던 사치는 볼일을 보고 시간이 남으면 혼자 영화를 보고 아이쇼핑을 하는 만원의 행복이었다. 외출해도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에는 집에 있어야 한다는 고집이 나를 가둔 셈이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를 위해 살려고 할 때 나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외출해서 자주 길에서 쓰러져서 이젠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집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나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살 수밖에 없다. 병으로 인해 대중교통도 타지 못해 친구를 만나지도 못하고 쇼핑도 카페도 불가능하다. 보호자가 있어야만 가능한 나의 외출
지금 나의 세상은 동네가 전부이다. 마트를 가더라도 딸 집에 가더라도 혼자는 안된다.
산책을 나가서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들이 많다.
전환장애로 인해서다. 갑자기 마비가 오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상황이라 겨우 늘 다니는 곳을 다닐 뿐이다. 그것조차 안 되는 날들도 많다. 산책에도 보호자가 필요하다. 언제 어느 때 쓰러질지 모르기에
좋아졌다고 혼자 나갔다 길에서 2시간씩 쓰러져 있기도 했고 119에 신고해서 차를 타고 오기도 참 많이 했다.
산책에서 집 현관 앞에서 번호키를 누르지 못해 30분씩 마비로 있어야 할 때도 많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산책조차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집안에서 갇혀 살 수밖에 없는 상태.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와도 무조건 나간다. 매일 만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정말 하루종일 마비가 심하기 오지 않는 한 미룬 적이 없다.
산책은 내가 살아있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고 내일을 위함 언젠가 올 혼자만의 외출을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