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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새꽃 Jan 10. 2025

마음의  병 시작

우울증, 공황장애

시할머님의 말씀이 항상 그러셨다.

'석이 애 낳으면 기저귀 빨아주고 죽어야지'

말이 씨가 되고 현실이 되었다. 큰딸 5살 작은 딸 3살에 할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한 달간의 병원생활을 끝내시고 집으로 오셨다. 할머니는 하마신 마비로 혼자 일어서지도 아무것도 하시지 못하는 상태라서 누군가 돌봐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시아버지는 당뇨로 주무시는 시간이 많으셔서 낮에는 거의 시어머님이 가게와 배달을 하셔야 했다.

할머니가 오시면서 생활의 패턴은 그대로인데 돌보야 할 사람이 있다 보니 누군가는 할머니한테 매달려 간호를 해야만 했다. 낮시간에는 1층에서 살림을 내가 하기에 1층에 있는 낮 동안은 내가 하고 밤에는 어머니가 하시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어머니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다


멋모르고 덤빈 것이다. 고마움에 간호를 하기로 작정했다. 큰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던 시기라 그나마 여유로운 때여서 나름 생각해서 자처를 했다.

할머니 식사부터 대소변까지 낮에는 혼자 감당했다.

퇴원하면서 욕창의 생겨 나오셨는데 매일 연고를 바르고 말리고 해서 낫기 힘들다는 욕창을 낫게 해 드렸다. 낮에는 할머니 말벗을 해 드리고 저녁 아이들이 잘 시간에 2층에서 자고 아침이면 내려와 할머니 돌봄과 살림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걸레질만 해도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호흡이 빨라졌다. 이상함을 감지하고 처음 간 곳은 내과였다. 아무 이상 없지만 나는 숨이 차 너무 힘들어서 내과 약을 꾸준히 먹으며 할머니와 실랑이를 했다.


어떤 날은 기분 좋으시면 웃으시고 어떤 날은 대변을 보시고 쿨쿨 잠을 자면 이불에까지 새어 나와서 옷을 갈아입혀 드리고 이불을 빨아야만 했다. 그런 날들의 연속에서 움직이지 않으시니 변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난이도는 더 높아져만 갔다. 변을 보지 못해 애를 쓰시는 모습이 안쓰러워 좌약도 넣어도 소용없고 해서 끝내는 손가락으로 파야했다. 아니면 엉덩이를 벌려서 변을 편하게 보도록 해 드렸다.


하루는 유치원에서 학예회가 있어 갔다 오니 집안이 난리가 난 것이다. 시어머니는 계모임에 가시면서 조금 더 누우면 치워준다 하시고 나가신 거다. 치우고 나가면 좋으련만 그냥 나가시니 할머니의 이불과 몸은 엉망이었다.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이불을 새로 펴드리고 저녁을 드렸더니 그제야 편해지셨다.


처음은 안쓰러워서 대화도 많이 해드리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지쳐만 가고 어머니 아버님의 태도가 맘에 안 들어서 더 지쳤다. 아버님은 내가 할머니 지저귀를 갈면 냄새난다고 방으로 들어오시다 도망을 치시고 그중에도 싸움은 한결같았다.

할머니는 빨리 치워주지 않아서 이불까지 더러워졌다며 욕을 하기도 하시니 힘들 수밖에 ' 니년이 빨리 안 치워줘서 그러지' 하면 나도 화가 나서 할머니만 볼순 없잖아 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할머니의 장기능이 완전히 상실해서 좌약을 넣고 부드럽게 만든 다음 손가락으로 매번 파내야만 했다.

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상하지 분명 냄새가 났을 텐데  어느 손자가 와도 인사만 하고 바로 나오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할머니는 건강하실 땐 가게 앞까지가 세상 전부였고 아프면서는 작은 방이 전부였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생각이 든다.

할머니의 변비는 고통의 날들로 이어지면서 난 조금이라면 편하게 해 드리기 위해 손가락으로 파야만 했다. 할머니는 얼마나 미안하셨을까 싶다.


며느리도 아닌 손부에게 자신의 치부를 보이셨으니 말이다. 나중에는 너 때문에 더 살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할머니의 시간과 나의 병의 속도는 빨라지기 시작했다. 팔이 아파 잠을 못 잘 정도가 되고 숨은 여전히 차고 힘든 시간이 흘러가며 할머니의 삶의 끝은 점점 가까워지고 나의 아픔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큰 사건이 벌어지면서 할머니의 이별이 더 가까워져야만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2층에서 살았던 우리인데 하루는 남편이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다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가 너무 커서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일이 커지고 말았다.


내용인즉 가게 문을 닫다가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셨는지 큰 소리로 ' 시어머니년이나 며느리년이나 똑같다고' 하는 소리에 화가 난 남편은 1층으로 내려가 화를 내는 아버지를 끌고 들어가 거실에 던졌다고 한다.

아버지를 던지는 아들새끼가 세상이 어디 있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우니 보다 못한 시할머니가 움직이지도 못하는 분이 방문을 두드리며 그만하라는 소리를 하셔서 싸움은 끝이 났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남편 왈 ' 사고를 쳤다' 고만해서 1층에 못 내려간다는 것이다. 2층에서 남편 밥을 해 먹이고 할머니를 돌보는데 그 사건 이후 할머니는 음식도 줄이시고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서로 대면대면 하는 동안 난 눈치만 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6.4 선거가 있던 날 아버님이 투표를 하시러  가신  틈을 타서 남편을 1층으로 불렀다. 할머니에게 '아비 왔어요.' 하니 눈을 뜨지 않으시던 분이 눈을 뜨고 남편을 보시는 것이다. 남편에게 할머니 손 잡아들여하니 '할머니 미안해' 라며 손을 잡아 드리고 2층으로 또 피신을 했다. 그 후로 할머니 상황은 갑자기 안 좋아지셨다.

남편을 보신 할머니는 물조차 드시지 않으셨다. 이틀이 지난 후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할머니를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드리고 하루 종일 맥박을 체크하며 몸을 살피는데 발부터 차가워지며 시간이 흐릴수록 맥박이 흐미해지면서 팔까지 차가우며 색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오후  4시쯤 되어서 할머니는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내쉬고 생을 마감하셨다. 아버님 어머니께 할머니가 이상하다고 하니 어머니가 오셔서 할머니를 살피고 코와 귀를 솜으로 막으시는 것이다. 아버님은 묵묵히 신의 일을 하실 뿐 마지막을 끝내 보시지 않으셨다.

난 작은 딸을 업고 할머니의 임종을 보아야 했다.



전환장애란 해리성 기억상실증이다 병명이 그렇다.

코드번호 44.7 해리성 기억 상실증

코드번호44.9 원인불명 기억상실증


두 가지 코드번호를 가지고 있다.

나의 경우는 특이케이스로 보통 중년에는 홧병으로 나타나는데 전환장애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처음은 우울증, 공황장애, 과호흡증으로 시작해서

13년에 병명을 제대로 알게 된 상태

전신마비가 오고 정신이 나간 상태는 아니고 모든 기관이 마비된 상태지만 주변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어떤 반응에도 반응하지 못하고 귀만 열려 있어도 상황 판단은 다 한다.

짧은 시간의 마비일수도 몇시간 동안 마비 상태로 올 때도 있다. 전조증상은 거의 없고 갑자기 마네킹이 되는 상태다. 아무리 꼬집고 때려도 악소리를 낼 수 없다.

아파도 말을 못한다.

누군가 힘으로 제압하려고 하면 무의식이 자동하여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다리를 구부리고 있으면 성인 남자가 피려고 해도 필 수 없다.

스스로 깨어나야 된다.

보통 네이버 검색에 하면 일시적인 마비 , 두통 이 정도로 나온다. 정신과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의사조차 모르고 119 대원들도 모르는 병이다.

널리 알려진 병이 아니다.

입원을 10번 이상 했지만 나와 같은 병명을 가진 사람은 못 봤다. 있긴 해도 드물다고 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뇌가 스트레스를 받기 싫어

몸을 말 안 듣게 하는 병이다. 즉 몸이 말을 안 듣는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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