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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새꽃 Dec 20. 2024

마음의 감기

병을 알기까지

친정아버지는 49살에 나를 낳으시고 18살에 세상과 이별하셨다. 전형적인 농부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아버지. 애정에 굶주린 난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싶어 입버릇처럼 맏이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얼굴은 농사일로 검은 얼굴에 주름 가득 이는 빠지고 선한 얼굴에 허리는 구부정하고 다리는 관절염으로 인해 걷는데 지장이 있는 전형적인 노인의 모습이다. 무뚝뚝하지만 사람을 잘 믿으시고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하신 분이었다.

엄마와는 나이 차이가 많았고 아버지는 남에게 피해보다는 남을 너무 믿어 속는 경우가 많으셨다.


엄마가 쌓아놓은 부를 모두 보증으로 난리셨다. 그 마음 때문에 엄마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셨다.

엄마 대신 소여물을 끓이시며 밥을 하시고 엄마가 아프면 팥죽을 쑤어주시고 농사일은 시키지 않으셨다.

늘 자고 일어나면 엄마는 아프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갱년기가 아니었나 싶다.



정이 많고 자식을 기다려 주시는 아버지

국민학교 5학년때 아버지 환갑 난 거부감을 느꼈다.

젊은 아버지가 있어 아빠라고 부르는 게 로망이었던 그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은 고작 환갑 때 찍은 단체 사진뿐이다.


아버지는 거하게 술 한잔 드시고 오시면 늘 내 이름을 불러 난 꼭 팔짱을 끼고 집에 함께 들어오던 기억과 내가 아파서 잠들었을 때 머리를 만져주시는 그 손길이 따뜻했던 것을 기억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아버지의 죽음을 거부하고 울지도 않았다. 내가 울면 아버지가 더 슬퍼하실 거 같아서였다.그 후로 아버지는 나의 꿈속에서 매일 보이고 난 고향집이 무서워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크게 다가오고 그 일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장남에게 결혼해서 젊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사랑받는 며느리로 살고 싶었다.


나의 바람대로 장남인 남편과 2년간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함께 살았다. 시할머니도 계셨고 시아버지는 결혼 당시 육십살이 되지 않은 상태 결혼은 딱 내가 바라던 가정의 적합한 그런 것이었다.


결혼이 내 삶을 힘들게 할 거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 노력하는 만큼 사랑받고 인정받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시할머니는 끔찍하게 사랑하는 손자의 손부라 마냥 잘 봐주셨다. 시어머니는 그저 평범하게 대해주셨다.


시아버지에게는 단점이 있었다. 결혼 전에 알고는 있었지만 며느리를 보면 바뀔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기에 상관하지 않았다. 막상 결혼하고 나니 결혼은 환상이 아닌 현실에 부딪히고 말았다.


고집 세고 완고하고 완벽주의 그리고 남과의 타협점이라곤 없는 술을 드시면 아무도 못 말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분이었다. 결혼하고는 바로 본색이 나오진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혼 초 남편은 지방으로 출장을 가서 할머니와 나는 같은 방을 쓰곤 했다. 나는 2층에서 신혼살림을 하고 1층은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쌀가게를 하며 살림하는 구조였다. 2층에서 자고 내려와 낮에는1층에서 시댁식구들과  함께 생활했다.


결혼초에는 시아버지가 나와 남편을 데리고 칠면조 고기를 사주시고 다정함을 보여주셨다.


낮 시간을 오래 함께 하다 보니 시어버지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어야만 했다.  시간을 어기면 날이 선 반응이 바로 날아왔다. 상을 업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어린 새댁인 난 밥상을 차릴 때마다 심장은 두 근 반 세 근 반 뛰었다. 아침 8시 점심 1시 저녁 6시 그렇게 세끼를 당뇨식단으로 차려야만 했다. 어머니도 할머니도 늘 긴장상태로 살얼음판 속에 살아야 했다. 불구덩이로 난 들어간 것이다. 사랑을 받고 싶은 간절함이 나를 벼랑 속으로 밀어 넣은 셈이었다.


임신하고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사건이 있다. 동네 사람과 대판 몸싸움이 벌어졌다. 재래시장이라 싸움이 나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배가 나온 임산부가 사람들이 구경하는 그 속에서 두 사람을 말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도 끊임없는 싸움은 일상이 되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딸이 태어났다. 겨울 초입에 들어서는 그때 찾아온 큰 딸 기쁨도 크고 유난히 작고 까만 아이가 내게 왔다. 삼대에 처음 태어난 손녀라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라났다.딸은 사랑스럽고 든든한 내 아이였기에 나는 어떤 경우도 이겨내리라 생각하며 살았다.


딸이 자라는 과정에서도 늘 싸움은 똑같았다. 밥상이 날아가고 물건이 날아가고 시어머니는 폭력으로 인해 도망 나가는 게 일상 그곳에서 남편도 없는 시집살이는 고되고 버거웠다. 크게 내색하지 못하고 무둑둑히 생활하면서 나의 로망이 사라졌다.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던 결과는 참으로 비참함  상실감과 원망이 쌓여가는 줄 모르고 살아가는 시간 속에 내 마음에는 천천히 감기에 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둘째가 또 딸로 태어나니 집에서는 실망감이 크고 둘째는 찬밥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둘째가 태어나고 대형사건이 터졌다. 딸이 태어나고 나서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시동생 결혼식이 있었는데 결혼식을 앞두고 시어머니를 폭행해서 얼굴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결국 몸조리도 못한 채 난 추운 겨울에 쌀가게를 봐야 했다. 추운 날 몸이 성치 않은 상태에서 쌀 배달을 하고 장사를 하고 나니 몸은 만신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을 치르고 나니 심한 기침으로 인해 딸은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다. 한 달도 되지 않은 갓난아이와 함께 난  보조침대에서 잠을 자고 딸을 케어해야 했다. 한 달 이상 딸은 병원을 들락거렸다.


둘째가 딸인데 아프기까지 더 큰 아픔이 속에서 일렁이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대로 살아야만 했다. 그 당시 내 나이 서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시밭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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