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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an 12. 2021

집사, 분리불안이 생기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집사


"언니, 오늘도 바로 집으로 가?"


오늘도 칼같이 퇴근 시간에 회사 문을 박차고 나왔다. 매서운 추위에 떨면서 버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는데, 나와 함께 '칼퇴 요정'을 담당하고 있는 직장 후배를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다.

   

"응, 집 가야지. 어우, 근데 너무 춥지 않아?"

"그니까. 날씨 무슨 일이야. 언니, 내가 어제 역 근처에 소품샵 예쁜데 찾았는데, 거기 같이 들릴래?"

"소품샵? 뭐 사게?"

"빈티지 접시 같은 거 사려고. 겨울맞이 인테리어랄까?"


예전의 나였다면 후배의 소품샵 제안에 고민 없이 오케이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집사가 된 나는 쉽게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집에 혼자 있는 사랑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저녁 시간에 맞춰 저녁밥을 주어야 하는데, 소품샵에 들린다면 시간이 늦어질게 분명했다.

불편한 마음으로 억지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후배에게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거절 의사를 밝히고 다음을 기약했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 출구를 향해 걸어가면서 슬쩍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구매한 홈 CCTV 어플을 켰다.

'솜 뭉탱이, 또 내 잠옷을 베고 있네. 이불 밑에 넣어뒀는데 또 어떻게 찾았대.'


오늘도 내 잠옷 위에서 뒹굴뒹굴하고 있는 사랑이를 보니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마음이 편해졌다.


예전에 한 친구가 내게 혼자 사는 여자 집에 홈 CCTV는 필수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었다. 그때는 쿨하게 그 말을 무시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홈 CCTV덕을 톡톡히 보고 있으니, 친구가 이 사실을 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것이다.


사실 이번에 구매한 홈 CCTV는 집사 4개월 차에 들어온 나에게 생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였다. 고작 집사 경력 4개월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고민이 생겼다니? 한번 나의 고민스러운 증상을 한 번 쭉 읊어봐야겠다.



-어떤 고민이 있으신가요?

-사랑이를 집에 혼자 두는 것이 너무 불안해요. 잘 놀고 있을지, 잘 자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고양이들에게 분리불안이 생길 수도 있다는데, 저는 제가 분리불안 같아요.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생기셨나요?

-음…. 유튜브에서 '고양이 우울증'이라는 영상을 봤을 때 같아요. 영상에서는 길 고양이와 집 고양이의 수면 시간을 비교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집 고양이가 길 고양이에 비해 현저히 수면시간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그 이유가 '심심하고 지루해서'라는 거예요! 그 설명을 듣고 사랑이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럼 언제 증상이 심해지시나요?

-사실 출근하는 순간부터 신경이 쓰여요. 그래서 출근 전에 미리 놀아주고, 장난감을 다 꺼내어 설치해두고, CCTV까지 틀어두고 나와요. 갑작스럽게 약속이 생기면 예전과 달리 거절할 생각에 스트레스부터 받고, 회사에 일이 생겨 퇴근이 늦어지면 스멸스멸 불안해지곤 해요. 저만 이런 걸까요? 초보 집사의 증상인가요?


나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집 밖에 나가기 싫고 내 눈에 사랑이가 보여야 안심이 되지만, 사랑이 캔 값은 벌어야 하는 신세이기에 출근 하지만,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늦어지면  역시나 스트레스를 받는 요즘이다.

물론 아까 말한 홈 CCTV덕분에 조금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지만.


이런 증상이 생겨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후회하기 싫다.'는 감정 때문인 것 같다.

고양이의 수명은 평균 15년에서 길면 20년이다. 사람에 비하면 그들의 생은 정말 짧디 짧다 볼 수 있다.


나에게는 내 인생의 15년에서 20년 동안 사랑이가 머물다가 떠나는 것이지만, 사랑이 입장이서는 인생의 전부를 나와 함께 보내게 된다.


그 시간 동안 사랑이가 지루하고 심심해하며 보내는 것보다 행복하고 즐겁고 재밌게 보냈으면 했다.

더 나아가 훗날 사랑이가 내 곁을 떠나 고양이 별로 가게 되는 날, 사랑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아닌 고마웠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슬픔은 크겠지만,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닌, 행복했던 추억으로 아픔을 이겨내고 싶었다.

아직 꼬물거리는 땅콩 같은 사랑이를 보면서 죽음을 떠올리는 내게 누군가는 과하다며 고개를 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사랑이에게 주절주절 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늘어나고

사랑이 덕에 웃는 날이 생겨나고

사랑이의 사진이 하나둘씩 늘어날수록


괜히 언젠가 찾아 절대 피할 수 없는 사랑이의 '죽음'이 생각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면 울적해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동시에 사랑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줘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단단해진다.


그 마음이 너무 과해져서 나를 피로하게 만들지 않도록 주의는 해야겠지만, 사랑이의 존재에 익숙해져서 노력에 해이해지지 않도록 해야지.

그러기 위해서 산 홈 CCTV는 열심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뭐지? 여러분, 이 글은 CCTV 광고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칼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오늘도 사랑이를 생각하며 누구보다 빠르게 업무를 마무리한 집사.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가방을 들고일어 캔 따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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