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앞에서 배우는 잘 늙는 법》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걸까?

by 랑세

아파트 정문을 나서 몇 분만 걸으면 바다가 나온다. 가는 길에 커피 체인점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받아 들고, 갈매기 몇 마리가 마중 나와 있는 방파제에 선다. 긴 갯벌이 펼쳐져 있다. 바닷물이 빠져 생긴 골들은 마치 주름살처럼 보인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바다는 늘 바쁘다. 만조가 되면 서해는 발밑까지 파도가 넘실대지만, 간조가 되면 길게 드러난 갯벌이 갈매기들의 놀이터가 된다. 파도는 들고 나기를 쉼 없이 반복하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한가롭게 커피를 들고 서 있는 내가 문득 죄스럽게 느껴진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여유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눈앞의 일을 해내는 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나뿐 아니라 주변 모두가 그랬다. 누가 바다를 느낄 여유 같은 걸 갖고 있었을까. 어쩌다 출장길에 바다가 스쳐 지나가도, 나는 그저 자동차 안에서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간혹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일 때면 나직이 읊조리던 시 한 구절이 있다.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욋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리.

― W.B. 예이츠, 「이니스프리 호수 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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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를 떠올릴 뿐, 내가 그 오두막 근처에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두막, 섬, 고요함... 그런 것들은 늘 ‘다른 삶’에 속한 단어들 같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바닷가 가까운 곳에 살며, 걸어서 바다에 닿고, 커피 한 잔 들고 물결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토록 바쁘게 살았던 시간의 끝에, 이렇게 조용한 아침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은 쉽게 편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걸까?”

“하루를 이렇게 흘려보내도 괜찮은 걸까?”

젊은 날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부럽다”라고 할까, 아니면 “그렇게 느슨하게 살아도 되냐”라고 물을까.

한 번은 바닷가 산책길에서 노부부를 마주친 적이 있다. 서로의 팔을 가볍게 끼고, 말없이 천천히 걷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한참 동안 눈에 밟혔다.

아, 나도 이제 그런 시절을 살아야 하는구나.

이렇게 걷는 시간은, 어쩌면 ‘잘 늙는 법’을 배우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아왔다.

하지만 바다는 그런 나에게 말없이 알려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멈추어 있어도 괜찮다”라고.

이제 나는 이 시간을 노년에게 허락된 마지막 특권이라 여기려 한다.

삶의 앞부분을 그렇게 바쁘게 달려왔으니, 이제는 멈춰도 되는 시간.

마음이 조급할 때면, 파도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텅 빈 갯벌, 고요한 수평선, 손에 든 따뜻한 커피 한 잔.

이 바닷가 산책이 내 삶에 남겨진 가장 조용하고도 귀한 시간이 되기를,

나는 오늘도 바다 앞에서 그렇게 배워간다.

잘 늙는 법을.

해변 인천대료.jpg

ps ; 바닷가에서도 배움은 있다.

사진출처 ; 작가 본인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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