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흔들리며 피어나다.
회사에선 이상한 일이 자주 벌어진다.
조직에서 사람을 몰아붙이던 상사는 승진하고,
모두를 챙기던 팀장은 자리를 보통 잃는다.
말을 아꼈던 사람은 책임을 지고,
소리를 지른 사람은 성과를 챙기는 것까지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진다.
성과는 빠르게,
책임은 늦게 지려는 조직의 풍경.
그 속에서, ‘좋은 리더’라는 말은
점점 신기루처럼 멀어져 간다.
더욱 이해하기 힘든 대목은
우리는 늘 좋은 리더를 원한다고 말한다.
정말 좋은 리더를 원했던 걸까,
아니면 좋은 척하는 강한 리더를 원했던 걸까.
나는 이상한 일에서 부터
최근, 프리미엄 리그 축구에서 흥미로운 감독
누누 에스피리투 산투를 떠올렸다.
그는 토트넘에서 실패했고,
노팅엄 포레스트에선 성공하고 있다.
같은 리그, 같은 감독.
말수가 적고,
절제된 리더였지만,
그의 방식은 그곳에서 통했다.
토트넘은 그를 감당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다급했다.
성과를 당장 요구했고,
슈퍼 스타들은 확신보다는 명령을 원했다.
선수들은 즉각적인 피드백에 익숙했고,
조직은 빠른 승리에만 반응했다.
그 안에서 누누의 조용한 방식은,
점점 불안과 오해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조용한 리더는 그 자체로
리더십의 부재처럼 보였다.
지시가 없으면 멈추고,
의도가 보이지 않으면 불신부터 생기는 구조.
그곳에서 누누는,
‘조용한 리더’가 아니라
‘두렵게 조용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노팅엄은 달랐다.
조직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고,
리더에게 기대는 것밖엔 남은 게 없었다.
누누는 구조를 세우고 싶어 했고,
침묵과 기다림으로 리더십을 드러냈다.
그들은 누누 감독을 받아들였고,
기다려줬다.
결과는 천천히 나타났고,
그 신뢰 위에서 팀은 다시 살아났다.
이건 전술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 문화의 문제다.
조직이 진짜 좋은 리더를 원한다면,
그를 실패시키지 않을 준비도 함께 되어 있어야 한다.
토트넘은 좋은 리더를 데려와 놓고,
결국엔 그를 몰아냈다.
성과는 빨리, 책임은 그에게.
그건 리더십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좋은 리더는 왜 실패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그런 조직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좋은 리더는 지시하지 않는다.
묻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말문이 막힌다.
대답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조직은 먼저 자문해야 한다.
“우리는 좋은 리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리더는 또다시 실패할 것이다.
조직은 익숙하다.
강한 리더십을 ‘성과의 대리인’으로 삼는다.
책임을 나누기보다는 전가할 수 있는
’시켜서 합니다 ‘라고 말하는 구조를 더 선호한다.
그래서 ‘좋은 리더’는 부담스럽고,
‘지시형 리더’는 편하다.
조직은 종종 성과는 리더에게서 끌어내고,
책임은 리더에게 모두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좋은 리더’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원하는 건
지시하고, 몰아붙이고,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나는 바란다.
성공보다 신뢰를,
성과보다 기다림을,
책임보다 함께함을 선택할 수 있는
조직이 되기를.
그 리더가 다시는,
혼자 실패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