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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Dec 05. 2018

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소중해

사랑으로 길들여진 가족 그리고 일상

새벽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이른 아침 버스를 탄다. 피곤해서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의자를 살짝 뒤로 젖힌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본다. 잠시 뒤에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뜬다. 핸드폰에는 아내의 번호가 뜬다.

“여보세요?”


아빠...


아내가 아닌 태한이 목소리가 들린다.

“어 태한아. 벌써 일어났어?”
“아빠...”
“어 왜~”
“보고싶어...”

이럴 때 ‘심쿵’ 이란 말을 쓰는 건가 싶다. 다섯 살 아들의 보고싶다는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훅 뒤흔든다.

“태한아. 아빠도 너무 보고싶어. 저녁에 퇴근하고 보자~ 알았지?”
“웅. 태한이 코 자기 전에 오는 거지?”
“당연하지. 어린이집 잘 다녀와서 저녁에 재밌게 놀자~”
“알떠.. 아빠도 회사 잘 다녀와”
“응 태한아 사랑해”
“나도 사랑해. 끊어~”

자녀에게 사랑받는 이 기분이 참 행복하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나의 자존감을 올려준다. 아빠에게 미운말도 하고 눈도 흘기고 짜증도 내는 아들이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미울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녀석은 아빠엄마가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크게 혼내면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는 그런 연약한 아이다. 내가 필요하다. 짜증을 내고 미운 말을 하는 것도 내가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의 미운 행동 조차도 그저 사랑스럽다.



추억이 선물하는 행복


아내는 결혼 후 매년 앨범을 하나씩 만든다. 카메라나 핸드폰으로 담았던 일상의 추억을 사진으로 인화해서 오프라인 앨범으로 만든다. 수천장의 사진을 보면서 고르고 골라 20장 정도만 선별해 앨범을 만드는 작업은 왠만한 정성과 애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아내에게 고맙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추억을 책장 한 곳에 쌓아가는 일이 즐겁다. 아내는 앨범 뿐만 아니라 블로그에도 우리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몇몇 친한 사람들만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사실 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목적은 먼 미래에 태한이에게 보여주고 싶어서다. 우리 가족의 평범하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도록 인터넷에 글과 사진, 영상까지 담아 두었다.

요즘은 온라인 서비스들이 참 좋아졌다. 나와 아내는 구글 포토 서비스를 통해서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온라인 상에 보관해둔다. 무제한 용량이라 걱정없이 쓸 수 있다. 게다가 여행 다녀온 사진을 앨범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과거 같은 날의 추억을 사진으로 떠올려 주기도 한다. 태한이 어릴 적 사진부터 모두 모아두었더니 태한이의 성장 과정을 영상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단순한 사진 보관 서비스가 아니라 행복했던 추억을 현재로 배달해주는 추억 배달 서비스다.

가족들이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는 풍경은 익숙하다. 어떤 이들은 사진을 찍고 있느라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며 지적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살다보니 남겨진 사진과 영상이 주는 행복감이 얼마나 큰 지 새삼 느낀다. 이 기록들이 없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즐거움이다. 사진을 찍는 일이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제는 나도 적극적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책장에 꽂힌 앨범을 꺼내 보면서, 아내가 올린 블로그의 일상을 보면서, 구글이 알려주는 추억의 사진을 스크롤 하면서 아빠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향수nostalgia’의 어원은 그리스어인 ‘노스토스nostos’와 ‘알고스algos’로, 각각 ‘회귀’와 ‘고통’을 뜻한다. 향수는 단어 의미로는 과거가 다시 돌아오기를 갈망하며 느끼는 고통을 가리키지만, 심리학자들은 이것이 대부분 유쾌한 상태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과거의 어떤 사건을 돌이켜보며 곰곰이 생각할 때 더욱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과 유대감이 깊어지는 경향이 있다. 흔히 삶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다.
- <옵션B> (셰릴 샌드버그,애덤 그랜트 저/안기순 역/(주)미래엔)



함께일 때 더 즐겁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한 이유는 서로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에 소중하고 함께 하면 행복하다. 때로는 밉고 화도 나고 짜증도 날 때가 있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사람이 함께 사는 과정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그런 상대의 모습까지도 품고 인내하고 용서하기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갈 수록 사랑하는 마음이,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더욱 커진다.

나는 내향적인 성격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결혼 후에는 늘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하다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아내는 가끔씩 그런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막상 혼자 있게 되면 무얼 해야할 지 몰라서 멍하니 있을 때도 있다.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에 길들여져 혼자만의 시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한 두 시간만 지나도 빨리 아내와 아들이 보고 싶었다. ‘혼자’보다 ‘함께’일 때 더 즐겁다는 것을 몸과 마음이 먼저 알고 있다.

결혼 1주년을 앞 둔 어느 날, 결혼 예물로 산 아내의 귀걸이 한쪽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내는 무척 실망스러워했고 한쪽 귀걸이는 몇 달간 빛도 보지 못하고 서랍 구석에 묻혀 있었다. 아무리 예쁜 귀걸이여도 한쪽만 있으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혼기념일을 앞둔 며칠전, 예물을 구입했던 가게에 들려 귀걸이 짝맞춤을 요청했다. 드디어 아내가 소중히 아끼던 귀걸이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내에게 기념일 편지를 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없어지면 어떡하지? 아내없이 난 어떻게 살지?'

1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미 아내를 의지하는 마음이 커져있음을 깨달았다. 아내없이는 짝을 잃어버린 귀걸이처럼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람이 될 것처럼 느껴졌다. 혼자서 잘만 살 것 같던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특별하고 소중한 일상들


태한이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낯선 얼굴로 만났지만 이제는 태한이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태한이는 생후 2개월 정도였다. 당시에도 먹먹한 마음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감의 깊이가 깊어졌다. 아이가 커가면서 아이에 대한 애정도 커진다. 혹시나 오늘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는 지, 집에 무사히 돌아왔는 지 걱정될 때도 있다. 아이를 잃는 상상만 해도 마음이 무너지고 적막해진다. 세월호로 자녀를 하늘나라로 보낸 부모님들의 고통이 결코 위로받을 수 없음을 조금이나마 느낀다. 자녀가 없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다. 가족은 함께 하는 시간, 사랑하는 시간이 쌓여 어느새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다. 서로가 낯설었던 과거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몇 년전 아내와 대화를 나누다가 각자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만약 나에게 1년의 시간만이 남았다면 난 무얼 가장 하고 싶을까?


이 질문을 조용히 떠올려 보았다. 하고 싶은 일 보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 먼저 생각났다. 아내와 아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내게 단 1년의 시간만 남아 있다면 무엇을 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2017년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숨결이 바람이 될 때>는 죽음을 앞둔 젊은 의사의 이야기다. 유수의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은 30대 신경외과 레지던트 폴 칼라니티는 절망적인 죽음 앞에서도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폴의 나이가 나와 비슷했다. 아내와 하나 뿐인 자녀를 두었다는 것도 같다. 그래서일까 아내와 자녀를 두고 떠나야 하는 아빠의 상황에 감정이입이 되어 마음이 아렸다. 상상조차 하기 싫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딸에게 남긴 메시지는 너무나 공감이 돼서 코끝을 찡그렸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이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만약 지금 내가 죽음 앞에 맞딱뜨린다면 그와 같은 말을 아내와 태한이에게 남기고 싶다. 나와 함께 해준 가족들 덕분에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을 누리며 살았다고.

우리 가족은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먼저 태한이에게 이렇게 묻는다.

"오늘 하루 어땠어?"

매번 비슷한 대화가 오간다.

"즐거워떠"
"뭐가 제일 즐거웠어?"
"장난감 가지고 논 거"
"속상한 일은 없었어?"
"음... 없어떠."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 한다.

"그럼 태한아 잘 자~ 사랑해~ 좋은 꿈 꿔~"

그럼 태한이도 똑같이 말한다.


응. 잘 자~ 사랑해~ 좋은 꿈 꿔~


그렇게 우리 가족의 하루가 막을 내린다. 이 특별할 것 없는 소중한 일상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잘 자고 사랑하며 좋은 꿈을 꾸는 그런 행복한 삶이 무너지지 않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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