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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an 22. 2017

굳은살의 힘

조급함을 이해하는 법

대학시절 나의 유일한 낙은 동아리방에 가는 거였다. 반으로 잘린 기타로 장식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쿰쿰한 냄새와 함께 마루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쪽 벽면에는 낡았지만 쓸만한 기타 몇 대가 줄지어 놓여있었고, 그 옆엔 기타 운지법이 그려져 있었다.

동아리에 가면 벽을 바라보고 앉아 제일 쉬운 곡의 악보를 펼쳐놓고, 눈으로는 운지법을 쫓아가며 두 마디 간격으로 바뀌는 코드를 그렇게 느리게 옮겨 짚었었다. 세상 내 맘대로인 박자에 맞춰 띄엄띄엄 듬성듬성 한곡을 완곡하면 뿌듯함과 함께 왼쪽 손가락 끝에 아픔이 밀려왔다.

기타를 배우며 가장 힘들었던 건 그 아픔이었다. 여섯 개 현을 바쁘게 옮겨 짚고 종종 그 위를 미끄러지듯 슬라이딩을 할 때는 손에 금이 가는 것 같았다. 특히 제일 가느다란 1번 줄은 연하디 연한 새끼손가락을 고문하는 듯했다.

그래도 줄을 최대한 꾹 눌러야 깨끗한 소리가 나기에, 아프다고 대충 할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아픔을 줄여보려고 줄이 넥에서 덜 떠있는 좋은 기타를 선점하고 싶었지만 경쟁자가 많아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손끝이 빨갛게 붓고 가라앉고, 살갗이 벗겨지고 돋아나기를 수차례. 손이 망가지고 색이 예쁜 매니큐어를 바르지 못하는 것도 싫어서 그만 포기할까 망설인적도 있었지만, 노력한 시간만큼 점점 실력은 늘어 몇 시간을 줄곧 기타를 쳐도 아프지 않은 날이 오고야 말았다.

'혼자 기타 치며 노래하는 여자'라는 로망을 멋지게 이어가던 그때. 손 끝의 굳은살이 그렇게도 고맙고 자랑스러웠던, 성취에 심취한 나날들이었다.






제주에 내려와 새로운 일을 하면서 무언가 생각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부대끼거나 상처받는 일이 생기면 이상하게도 그때가 떠올랐다. 그럴듯하게 기타를 치던 순간이 아니라, 아프고 아프게 굳은살이 박이던 인고의 시간이. 처음이라 서투르고,  몰라서 실수하는  모든 순간들은 띄엄띄엄 듬성듬성 코드를 짚고 마디를 읊던 그때와 닮아있다. 힘들지만  필요하고, 절대로 건너뛸  없는 시간이라는 것까지 말이다.

 

'해봐서 알잖아, 결국 해내게 될 거야.'


자신에 대한 실망과 사람들의 시선에서 촉발된 조급함이 나를 좀먹을 때 되뇌곤 한다. 나는 지금 굳은살이 박이고 있는 거라고.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없는 재능을 아쉬워하는 아둔함이나 도망을 선택하는 무책임함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매일 꾸준히 해내는 열정과 끈기라고.


열정과 끈기라니.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이지 않은가. 물론 이런 흔한 사고 방식이 채찍질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렇게 조급하게 살지 않으려고 회사를 그만뒀는데. 이렇게 살지 않으려고 제주에 내려왔는데.'라는 생각이 수시로 고개를 든다.


조급함을 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참 좋다. 그리고 꼭 필요하다. 나는 거기에 꽤 오랜시간을 쓰고 나서야 조급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아무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조급함을 무시하는 쪽이 아니라 조급함을 이해하고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지난 몇 년동안 자신을 재촉하지 않으며 관대하게 살아보니 알게 되었다. 적어도 나는 푹 퍼진 마음가짐으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사람이란 걸. 그래서 나는 나를 믿지 않는 대신 내가 쌓은 굳은살의 힘과 굳은살이 박이던 시간을 믿어보기로 했다. 수시로 내면의 평화를 망치려 드는 조급함을 다독이며, 그렇게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면 뭐라도 되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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