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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Feb 07. 2020

잘 자라다오, 그 말 너머

어쩌면 키우는 건 마음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엔 화분이 많았다. 군자란, 벤자민, 행운목, 산세베리아, 고무나무 외에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크고 작은 화분이 개수로만 30여 개가 넘었다. 아파트 좁은 베란다가 흡사 정글처럼 꽉 찰 정도였다. 주말이면 분갈이를 하고 화분에 물 주는 일이 부모님의 주요 일과였다. 가끔 과하게 물을 줘서 바닥에 흘러넘치는 일이 많아 한구석엔 마른걸레 뭉치가 수북했다. 엄마는 수시로 화분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서로 위치를 바꿔주었다. 고르게 햇빛을 받으라고 하는 일이었다. 


베란다가 없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도 화분은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거실의 대부분을 화분들이 차지했고, 이곳에서도 역시나 화분에 물을 주고, 흘러넘치고, 이리저리 옮기는 일은 이어졌다. 거실 바닥은 원목 재질이라 도기인 화분에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생겼고, 가끔은 물을 과하게 먹어 불거나 썩는 듯 빛깔이 변했다. 엄마는 안타까워하며 화분을 한두 개씩 줄였지만, 정글에서 나무 한두 그루 벤다고 정글이 아닐 순 없었다. 


정성스레 키운 난은 다른 화분에 옮겨 심어 이웃 아주머니들에게 분양해주기도 했다. 희한하게 다른 아주머니들도 식물 키우는 게 취미였고, 일전에 가져간 난에서 또 새순이 돋았다는 둥 근황을 주고받으며 수다를 떨곤 하셨다.


엄마는 가끔 공기정화에 좋다는 산세베리아 화분을 방에 넣어주며 알아서 물 주고 키워보라고 하셨는데, 나는 귀찮으니 화분 빼라고 짜증을 내곤 했다. 그 키우기 쉽다는 다육이마저 말려 죽이는 게 나였다. 동물은 몰라도 식물을 키우는 건 엄마와 달리 재능이 없었다. 엄마는 내 짜증에 눈을 흘기면서도 언제나 적당한 때에 이파리에 앉은 먼지를 닦고 물을 주었던 것 같다. 시들지 않고 잘 자랐던 것을 보면 그랬을 것이다. 식물 키우기는 재능이 아니라 정성이고 애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직장 때문에 부모님과 따로 살던 시절, 몇 년간 꽃 한번 피운 적 없는 군자란과 행운목에 꽃이 피면 잘 다루지도 못하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보내주셨다. "올해는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보다."라는 문자와 함께. 사는 게 한창 팍팍할 땐 나도 그 꽃무리에 희망을 가져봤다. 그래서 그 해에 좋은 일이 있었는지는 딱히 모르겠다. 다만 "그랬으면 좋겠네요."라는 답장을 보낼 때만큼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부모님 집에 다니러 갔을 때 한낮의 볕이 좋아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웠던 적이 있다. 아스라한 햇살이 반사되는 널찍한 거실 바닥은 화분에 긁힌 자국 투성이었다. 가자미처럼 바닥에 붙어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숫자를 헤아렸다. 엄마는 화분을 옮길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 자국 하나하나가 엄마의 헛헛한 마음결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내 헤아리기를 멈췄다. 유독 넓어 보였던 거실엔 화분이 많이 줄어있었다. 


돌이켜보면 엄마가 식물을 많이 키우기 시작한 건 오빠와 내가 성인이 되어서부터였던 것 같다. 더 이상 물을 주고 양분을 먹일 존재가 없어서 그랬나. 아니면 당신이 이렇게 저렇게 해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군말 없이 받아주는 존재여서 그랬을까. 뭐, 그냥 단순히 식물이 좋았을 수도 있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식물뿐이라고 여겨지는 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지 않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나도 엄마를 닮아가는지 점점 식물이 좋아진다. 화분에 물을 주고 푸른 이파리를 매만지면 조금은 선량해진 기분이 든다. 물론 여전히 잘 키우지는 못한다. 화분의 흙이 말랐다 싶을 때 물을 주는 것 외에 크게 할 줄 아는 게 없다. 작업실엔 휘카스 움베르타와 올리브나무, 해피트리(녹보수), 멕시코 소철이 있는데, 나는 그중 재물과 행복, 행운을 상징한다는 해피트리에 제일 신경을 쓰는 편이다. 식물에 마음을 담아 뭔가를 기원한다니, 과거의 내가 보면 기가 막혀 웃을 일이다. 


최근 신경 써서 키우는 식물이 하나 더 늘긴 했다. 고양이 '필자'에게 먹이는 캣그라스다. 초록초록 잘 자란 캣그라스를 밥그릇에 싹둑싹둑 잘라 섞어주면 꽤 잘 먹는다. 자를 때 풍기는 싱그러운 풀 냄새는 나까지 기분 좋게 만든다. 밥 먹는 내 고양이를 보고 있노라면 잘 먹어주니 고맙고, 또 씨앗을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식물에게 하는 '잘 자라다오'라는 말이 식물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그 너머의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단 걸 알겠다. 역시 식물 키우기는 재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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