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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Mar 06. 2020

아날로그

불편함의 쓸모②

작업실에는 손님용 책상 두 개가 있고, 각 책상에는 한글 타자기 한대와 연필, 연필깎이, 지우개, 종이 다섯 장, 방명록 등이 비치되어 있다. 앉기 편한 독서용 소파와 각종 책들은 공용이다. 작업실은 예약제로 운영되는데, 예약자에게는 안내 문자가 발송되도록 설정해 두었다. 문자 내용을 어떻게 적을지 고민하다가 내가 쓰기로 결정한 것은 일종의 예고였다. 느리고 불편한 공간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라는 예고.


안녕하세요. 제주 동쪽 종달리, 느린 글쓰기 작업실입니다. 글쓰기 공간을 예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은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쓰는 도구는 충분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쓰고자 하는 마음만 가지고 오세요.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  - 공간지기 드림


타자기와 빈 종이, 책 한 권, 연필과 지우개가 놓여있는 손님용 책상.


작디작은 공간 하나 방문하는 데 뭐 거창하게 마음의 준비까지야 필요할 리 없다. 다만 터치 한 번으로, 디지털 펜을 휙휙 움직이는 것만으로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대와는 결이 다른 공간이기에 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오는 손님에게 미리 말을 해두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손님들은 갑자기 주어진 아날로그 도구 앞에서 아주 잠깐 허둥대고, 이내 적응한다. 컴퓨터와 달리 한번 친 글자를 지울 수 없는 타자기 앞에서 신중해지고, 오랜만에 쥐어본 연필을 정겨워한다. 나는 그 머뭇거리는 타자기 소리를,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못내 사랑한다. 이 공간과 도구가 주는 불편함을 온전히 즐기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내가 처음으로 타자기를 실물로 접했을 때,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능숙하게 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깜박이며 뭔가를 쓰기를 재촉하는 커서가 없어서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받침 있는 글자를 쓸 때마다 생각과 다른 타이밍에 받침 키를 따로 눌러주어야 하는 2벌식 타자기는 불편하고 번거롭게 느껴졌고, 자꾸 오타가 나니 짜증도 났다. 익숙하지 않은 기계이기에 완벽하게 한 문장을 쓰려면 같은 문장을 수십 번 반복해서 쳐야 했고, 잠깐 딴생각을 하거나 방심하면 곧바로 실수를 했다. 연습 또 연습, 완벽한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타자를 치고 나면 어느새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타자기에 매료된 건 그 때문이었다. 오타 없이 예쁘게 써낸 종이 한 장의 결과물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온전히 집중하는 감각. 아무런 잡생각 없이, 내 손끝으로 활자를 찍어내는 일에만 집중하는 경험 말이다. 밥벌이로 글을 쓰는 일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서 일과 후엔 멍하니 온갖 뉴스와 피드의 물결을 타고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생활이었던, 그래서 어느새 책 한 페이지 집중해서 읽는 것도 힘들었던 내게 타자기는 잊고 지냈던 감각을 되돌려 주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머리로 글을 완성하고 이를 신중히 옮겨 적는 일이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커서에 쫓기고 의미 없는 활자를 썼다 지웠다 하는 편리한 글쓰기의 행간 사이엔 소거된 감각이 분명히 존재했다.


대학생 때 처음으로 수동 필름 카메라를 샀었다. SNS가 유행하면서 보급형 디지털카메라가 쏟아지던 시기였다. 디지털카메라는 조리개와 셔터스피드, 노출, 심도에 대한 지식 없이도 오토 모드로 두면 알아서 사진이 잘 나왔다. 편리하고, 사진의 퀄리티도 좋았다. 그럼에도 수동 카메라를 산 이유는 호감이 있던 친구가 낡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였기에 공감대를 만들려는 다소 불순한 의도였다.


아무런 지식도 없는 채로 도서관 서가 구석 창가에서 바바라 런던의 「사진학 강의」를 읽었다. 어떤 원리로 사진이 찍히는지, 원하는 심도로 사진을 찍으려면 조리개와 셔터스피드를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배워나가며 사진 찍는 행위가 보다 만족스러워졌다. 심지어 결과물을 바로 확인할 수 없으니 애가 닳았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한다는 것은 한 롤을 다 찍고 현상소에 맡겨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된 행위였다. 그 끝에 마침내 받아 든 사진들은 사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어떻게 나왔을지 기대하는 설렘과 의도한 대로 사진이 나왔을 때의 기쁨, 예상외의 사진이 나왔을 때의 웃음까지. 필름 카메라는 충만한 감정 그 자체였다.


디지털카메라는 그 모든 일련의 시간과 감정을 소거했기에 편리하다 불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디지털 문화, 기기가 없던 시절엔 아날로그 문화, 기기가 주는 불편함이 당연한 것이었을 테다. 타자기 역시 손으로 펜을 쥐고 글을 쓰는 감각과 즐거움을 소거한 도구였을지도. 과거의 불편함이 현대의 편리함으로 소거되고, 현대의 편리함은 또 미래에 불편함으로 치부되어 미래의 편리함에 의해 소거될 것이다. 인간은 늘 인간의 생활을 현재보다 편리하게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 많은 이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일은 돈이 되고, 사람들은 그렇게 얻은 편리함으로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디지털 문화와 기기를 익히기도 전에 또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고, 또 그것을 익히기도 전에 새로운 것이 나온다. 따라잡기도 벅찬 속도로 달리며 모두가 말하는 더 나은 생활이란 무엇일까.


레트로 열풍이다, 복고 열풍이다, 빈티지다 해서 오래된 물건들이 인기라고 한다. 카세트테이프와 워크맨, LP판과 턴테이블, 연필과 지우개, 타자기, 종이책, 필름 카메라... 과거엔 당연했던 불편함을 이제 돈과 시간, 에너지를 들여 누려야 한다. 더 나은 생활이라는 게 시간을 내어 '감정을 충족시켜주는 불편함'을 사는 거라면 세상이 조금은 천천히 변해도 되지 않을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데 쓰는 에너지를 현재에 있는 불편함을 온전히 누리는 데 써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잡생각을 하며 애먼 타자기만 두드려본다. 편리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소거될 또 다른 감각을 기리며. 타자기에 끼워진 종이는 오타로 가득하다. 그럼 뭐 어떤가. 내가 지금 충분히 즐거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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