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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Mar 13. 2020

쓰이지 않은

문장에 관한 단상들

1. 문득문득 머릿속에 완성형인 하나의 문장이 떠오를 때가 있다. 잊어버리기 전에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는 편인데, 적고 나면 이내 그런 문장을 적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다. 난 그 메모장의 문장들을 이렇게 부른다. 쓰였으나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이라고. 글을 쓰다 문장이 빈곤한 날 메모장을 뒤적인다. 언젠가의 쓸모를 생각하고 적은 문장이긴 하지만 딱 알맞고 쓸만한 게 있으면 쾌재를 부른다. 그 문장이 제 할 일을 하는 게 못내 기쁘다. 내가 그것을 도운 것 같아 뿌듯하다. 인력 사무소장이 된 것 같달까.



2. 조각난 문장들이 머리를 헤집고 다닐 때면 미처 남겨두지 못하고 잊는 문장이 생긴다. 난 그 문장을 잊었다기보다 잃어버렸다고 느낀다. 분실물처럼. 하지만 머릿속에 분실물 센터는 없고, 난 잃어버린 문장을 영영 되찾을 수 없다. 그 상실감은 꽤나 큰 편이다. 그래서 문장이 떠오르면 기를 쓰고 옷깃을 잡아끌어 앉히려 한다. 번듯한 원고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메모장에라도.  



3. 연결성 없는 낱개의 문장이 떠오르면 밑그림 없는 퍼즐 조각을 주운 것 같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니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다. 어쩐지 내가 무의식 중에 품고 있는 큰 덩어리의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온 미아 같다. 언젠간 깊게 뿌리내릴 곳을 잘 찾아주려고 임시로 메모장에 모으고 있지만, 그 언젠가가 아직은 멀게만 느껴진다. 나란 사람은 너무나 나약하고 게을러 위대한 이야기를 쓸 수 없을 것이므로. 그래서 가끔 눈 딱 감고 호흡 짧은 글에 입양을 보낸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라도 그 문장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4. 각각의 문장이 제 할 일을 다 하는 글을 좋아한다. 노는 것 같이 보이는 문장도 놂으로써 역할을 다하는 글. 괜히 써진 문장이 없는 글. 문장이 열심히 일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노는 직원이 없으려면 리더십 좋은 사장이 되어야겠지. 애초에 문장은 내 직원이 아닐뿐더러 난 리더십이 좋지 않으니 괜찮은 작가가 되긴 글렀다.



5. 책을 보다 가끔 마음에 드는 문장을 따로 적어두는데, 책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생경해질 때쯤 다시 보면 그 문장이 글 전체의 정서를 전달하지 못함을 알아채곤 한다. 문장은 글의 편린이다. 편린은 전체적인 주제 의식을 전달하기에 미약하거나 왜곡될 때가 있다. 문맥이 중요한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의미가 온전한 문장을 쓸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6.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고양이가 키보드 위에 앉았다. 혼내려다가 귀여워서 끌어안고 한참을 놀았다. 다음 문장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고양이에게 졌다. 아아, 나란 사람은 진정 나약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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