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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Mar 29. 2016

기역, 이라고 쓰다

삶을 붙드는 의식

어릴 때는 무엇이든 끼적이는 걸 좋아했다. 심한 악필이라 내 글씨를 보는 게 맘에 들진 않았지만, 획과 획이 만나 글자가 되고,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어 그 행간 조차 의미를 머금는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남에게 보여줄 수준은 아니었지만 하루에 몇 분이라도 시간을 내어 뭔가를 끼적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일상을 정돈하는 어린 나의 방식이었다.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고 싶었지만, 뚜렷한 형태가 있는 꿈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방송판에 들어가 '말'을 쓰게 되었다. 아나운서나 성우의 입을 빌려야 나올 수 있는 말. 내가 쓰지만 나의 것이 아닌 말. 남이 하기 좋고 듣기에도 좋은 말. 중학교 2학년도 이해할 줄 알아야 하는 보편적인 말. 말을 쓰는 작업은 흥미로웠지만 점차 갈증이 났다.


5년 후, 홍보 업계로 이직하면서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주 업무는 기업과 공공기관의 온라인 홍보용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이었다. 클릭을 유도하는 흥미 본위의 문장, 좋아요와 하트를 갈구하다 금세 피드에서 사라질 활자를 매일 써 내려갔다. 몇 년 후, 나는 쉬이 휘발하는 글자를 아주 능숙하게 토해내는 기술자가 되어있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백지의 공포와 커서의 재촉. 나는 결국 써야 하는 글에 잠식되어 쓰고 싶은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집에 와서까지 컴퓨터 앞에 앉고 싶지 않았다. 떠오르는 글감, 단어나 문장이 있으면 마음속에 꾸역꾸역 눌러 담아 놓기만 할 뿐, 손 끝으로 내뱉는 일은 흔치 않았다. 휴대폰 메모장에 키워드만 적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차곡차곡 쌓아둔 문장이 어느 날 봇물 터지듯 넘쳐서 흘러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문장의 범람을 거들 것이라 믿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타고난 재능이 언젠간 고매하고 완숙한 글을 이끌어내리라고. 


완벽한 착각이었다. 머릿속을 맴돌던 문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유실물이 되었을 뿐, 나는 그것을 되찾는 법을 몰랐다. 잃어버린 글의 조각도, 세월도 되돌릴 수 없이 흘러만 갔다.






몇 년이 지났을까. 나는 일 외의 글을 막힘없이 쓰는 감각을 완전히 잊었다.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나 어딘가 제대로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숨 쉬는 방법이나 걷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삶이 휘청거렸다. 부채감이 밀려와 쓰려고 앉으면 늘 글 곳간의 빈곤함과 마주해야 했다. 공허했다. 두렵고, 무서워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쓴다는 말이 우습다. 오래전 여기저기 끼적였던 메모를 옮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비유하자면 재활치료에 가까웠다. 이미 적혀 있는 글을 옮기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영영 이대로 새로운 문장을 쓸 수 없으면 어떡하지, 하면서.


신기하게도, 쓰는 감각은 천천히 돌아왔다. 처음 한두 개는 그저 옮기는데 급급했는데, 서너 번째 글부터는 조사나 어순을 바꿀 욕심이 생겼다. 대여섯 번째 글부터는 문장을 조금씩 없애고 추가할 수 있었다. 아홉, 열 번째는 새로 쓰거나 꽤나 많이 덧붙여 썼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손이 가는 대로, 그냥 막 되는대로 쓰곤 한다. 그렇게 쓴 글이 쓸만한 글이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아무튼 몇 줄로 요약하기엔 모자라지만 꽤나 성공적인 재활 치료였다. 결국 글을 쓰는 방법은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뭐라도 쓰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었다. 






몇 년 전, 야근 후 회사 선배와 술을 마신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회사에 평생 있을 것처럼 일하지 말라고 했다. 회사 일만 하는 대신, 내가 잘하는 것을 더 잘해서 내가 있는 어디든 그 바닥에서 수명이 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요즘 다시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다고. 자정 넘어 퇴근하는 날에도 되도록이면 조금이라도 쓰고 자려고 한다고.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글이지만 노력하고 있다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행이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본인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는 독서를 참 좋아하는데, 하루에 한 장이라도 책을 읽는 게 어느새 삶의 의식처럼 되어버렸다고. 오늘처럼 술이 떡이 된 날에도 집에 들어가서 자기 전에 한 장 읽으면, 자기는 오랫동안 유지해온 그 의식을 지킨 게 되는 거라고. 그러니 너도 오늘 들어가서 기역의 'ㄱ'이라도 쓰고 자라고. 그러면 매일 글을 쓰고자 하는 너의 뜻, 삶의 명맥이 유지되는 거라고.







회사를 그만 두면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착각이었다. 프리랜서로 글밥 먹기는 어지간히 쉽지 않았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 하던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핑계로 내 글을 놓는 날이 많아졌고, 여전히 휘청이며 살고 있다. 그런 나날이 쌓였다 싶을 때쯤 선배의 말이 경고창처럼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뭐라도 쓰고 있다. 삶에 진 글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오늘이라도 의미 있게 붙들기 위해서. 컴퓨터에 또박또박 입력되는 본고딕체가 내 필체보다 예쁜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이리 기분이 좋아도 이상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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