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에 관한 단상들
1. 문득문득 머릿속에 완성형인 하나의 문장이 떠오를 때가 있다. 잊어버리기 전에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는 편인데, 적고 나면 이내 그런 문장을 적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다. 난 그 메모장의 문장들을 이렇게 부른다. 쓰였으나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이라고. 글을 쓰다 문장이 빈곤한 날 메모장을 뒤적인다. 언젠가의 쓸모를 생각하고 적은 문장이긴 하지만 딱 알맞고 쓸만한 게 있으면 쾌재를 부른다. 그 문장이 제 할 일을 하는 게 못내 기쁘다. 내가 그것을 도운 것 같아 뿌듯하다. 인력 사무소장이 된 것 같달까.
2. 조각난 문장들이 머리를 헤집고 다닐 때면 미처 남겨두지 못하고 잊는 문장이 생긴다. 난 그 문장을 잊었다기보다 잃어버렸다고 느낀다. 분실물처럼. 하지만 머릿속에 분실물 센터는 없고, 난 잃어버린 문장을 영영 되찾을 수 없다. 그 상실감은 꽤나 큰 편이다. 그래서 문장이 떠오르면 기를 쓰고 옷깃을 잡아끌어 앉히려 한다. 번듯한 원고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메모장에라도.
3. 연결성 없는 낱개의 문장이 떠오르면 밑그림 없는 퍼즐 조각을 주운 것 같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니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다. 어쩐지 내가 무의식 중에 품고 있는 큰 덩어리의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온 미아 같다. 언젠간 깊게 뿌리내릴 곳을 잘 찾아주려고 임시로 메모장에 모으고 있지만, 그 언젠가가 아직은 멀게만 느껴진다. 나란 사람은 너무나 나약하고 게을러 위대한 이야기를 쓸 수 없을 것이므로. 그래서 가끔 눈 딱 감고 호흡 짧은 글에 입양을 보낸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라도 그 문장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4. 각각의 문장이 제 할 일을 다 하는 글을 좋아한다. 노는 것 같이 보이는 문장도 놂으로써 역할을 다하는 글. 괜히 써진 문장이 없는 글. 문장이 열심히 일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노는 직원이 없으려면 리더십 좋은 사장이 되어야겠지. 애초에 문장은 내 직원이 아닐뿐더러 난 리더십이 좋지 않으니 괜찮은 작가가 되긴 글렀다.
5. 책을 보다 가끔 마음에 드는 문장을 따로 적어두는데, 책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생경해질 때쯤 다시 보면 그 문장이 글 전체의 정서를 전달하지 못함을 알아채곤 한다. 문장은 글의 편린이다. 편린은 전체적인 주제 의식을 전달하기에 미약하거나 왜곡될 때가 있다. 문맥이 중요한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의미가 온전한 문장을 쓸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6.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고양이가 키보드 위에 앉았다. 혼내려다가 귀여워서 끌어안고 한참을 놀았다. 다음 문장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고양이에게 졌다. 아아, 나란 사람은 진정 나약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