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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Feb 14. 2020

시골살이

불편함의 쓸모 ①

휴대폰이 고장 났다. 충전 단자가 망가진 모양이다. 안 그래도 배터리 문제가 있어서 바꿔야겠다 생각 중이었는데 잘됐다 싶다. 이틀 정도 휴대폰이 안되니 참 여러 가지가 불편했는데, 크게 보면 사는 덴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아무도 나와 단번에 연락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완벽하게 혼자가 된 것 같아서 홀가분하기까지 하다. 당분간 휴대폰 없이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이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나와 연락이 안 돼서 답답한 건 내가 아니니까. 사실 연락 주고받을 곳도, 만날 사람도 많았는데 꼭 해야 하는 연락과 만나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닿게 되더라. 사실 그 외에는 내게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니었는지도. 차를 몰고 20분 여를 달려 읍내에 나왔다. 대리점에 들러 휴대폰을 주문하고, 가까운 해변 카페 근처로 나와 노트북을 켜고 새 상품이 도착했다는 카톡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다. 제주라, 섬이라 불편한 것들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 도리어 제자리에 있는 불편함이 좋다. 그 얼마나 많은 정당한 불편함들을 소거하며 빨리빨리 살아왔는지 돌아보는 중이다.

- 2017.03.17


제주에 온 지 반년쯤 됐을 때 휴대폰이 망가진 적이 있었다. 육지에 살 때는 널린 게 T월드고 KT Olleh였는데 집 근처에는 월드마트와 올레길만 있었다. 대형 휴대폰 매장이 있는 시내까지는 차로 왕복 두 시간이 걸렸다. 귀찮아서 이틀을 휴대폰 없이 보내다 가까운 읍내에 나가 새 휴대폰을 샀다. 역시나 원하는 컬러가 없어서 사장님이 다른 매장에서 얻어오느라 주문하고 몇 시간을 기다려서 받았다. 기다리면서 노트북으로 페이스북에 쓴 글이 위의 글이다. 그때 산 휴대폰은 아직도 쓰고 있다. 또 배터리 문제로 바꿀 때가 된 것 같지만 조금 더 버텨볼 참이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주인님의 캔 사료가 우선이므로. 


2년 전쯤엔 이사 전날 밤 한 뼘이 넘는 폭설이 내렸다. 당일 아침 용달 사장님에게 못 온다는 전화를 받았다. 모든 세간살이는 포장되어 있었고, 기름도 똑 떨어진 상태였다. 대부분의 제주 주택이 그렇듯 등유 보일러로 난방을 했다. 내가 사는 곳은 도내에서도 깡시골이라고 불리는 곳이라 도시만큼 빠르게 제설 작업이 되지 않았다. 이사 가는 마당에 새로 기름을 채우기도 아까웠지만 그보다 기름 배달 차가 아예 올 수가 없었다. 기름이 아주 조금 남아있었던 밖거리(바깥채)로 이불과 세면도구, 수저, 냄비, 쟁여뒀던 라면과 즉석밥만 가지고 피난을 갔다. 3일째 되던 날 아침 결국 밖거리의 기름도 똑 떨어졌고, 그날 낮에 눈이 녹아 겨우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웃기고도 황당했던 긴긴 비자발적 고립의 시간이었다.


이사한 집은 전에 살던 집 보다 더 오래된 집이었다. 한 번은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화장실 천장이 무너져 있었다. 삭을 대로 삭아 부러진 철근이 박힌 콘크리트 덩어리가 바닥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는데, 가장 큰 덩어리가 떨어져 있던 곳은 변기 안이었다. 잔해를 치우는 그 와중에 변기가 깨지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거기 앉아 있었으면 내 뚝배기가 깨졌겠지.


동네에 작은 슈퍼와 편의점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장을 보려면 차를 몰고 읍내로 나가야 한다거나, 겨울이면 난로용 등유를 사러 일주일에 두 번 초록색 기름통을 들고 읍내 주유소에 갔다가 낑낑대며 돌아온다거나, 간밤에 물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마당 수도관이 터져 물이 콸콸 흐른다거나, 보일러 온수 호스가 터진다거나, 예고 없이 마을 전체에 단수가 된다든가, 집에 들어오는 전기선 용량이 부족해서 동시에 여러 가전을 쓰면 정전이 된다든가, 수풀이 우거진 대자연 속에 집이 있어 여름이면 온갖 벌레와 곤충과 짐승(?)을 목도하게 된다든가 하는 건 흔한 일이니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기로 하자.  


아, 새끼 고양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건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 얘긴 다음에. 






아무튼 시골에서, 그것도 낡은 집에서 살아보니 매일이 시트콤이었다. 뭐가 됐든 화들짝 놀라는 건 기본이고 야심차게 세운 계획은 대부분 어그러지는 데다, 예상치 못한 큰 지출이 자주 생겼다. 도시에서 살 땐 겪어본 적 없던, 아니 난생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직면할 때면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가장 괴로웠던 부분은 늘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점이었다. 예측이 되면 대비라도 할 텐데 뭘 알 턱이 있나. 이번 생도 시골살이도 처음인 걸. 불편하고 또 불편한, 그래서 돈이 많이 드는 시골의 나날들이여. 


그런데 시골에서의 불편한 시간이 쌓일수록 하나의 생각은 점점 명확해졌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삶은 내가 어쩌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생각이 명확해질수록 그 사실을 알면서도 부정하며 살았던 과거의 나, 하루를 분 초 단위로 쪼개어 사람과 프로젝트를 컨트롤하며 살았던 도시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는 워낙 일이 많아 모든 사안이 급박하게 착착 돌아가야 하는데, 한 부분에서 지체되거나 삐끗하면 엄청난 스트레스와 짜증이 밀려왔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면 짜증이 더욱 배가되었다. 분명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항상 결론은 그것을 예측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됐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면 게임 끝이었다. 늘 패자는 나였다. 돌아보면 애초에 승자와 패자 따위는 없는 일이었는데도. 스스로를 괴롭히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였다.






제주에서 매일을 허둥지둥 산지 4년 차가 되니 여유가 좀 생겼다. 예측 가능한 부분은 대비도 한다. 벌레가 많이 꼬이지 않도록 집 밖에 박스를 쌓아두지 않는다거나, 바람이 심상찮은 날엔 간판과 화분을 실내로 들여놓는다. 수도관이 동파되지 않도록 두툼한 옷으로 감싸 두고, 거미줄은 거미에겐 미안하지만 거대 주택이 되기 전에 빗자루로 쓸어버린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훨씬 느긋하고 관대해졌다. 집의 어딘가가 고장 났을 때 며칠 뒤에 오는 수리기사 아저씨에게도 그러려니 하게 되고, 택배가 늦게 와도 기상 문제겠거니 한다. 사건사고가 터져도 이제는 제법 "이런 게 시골살이의 매력이구나, 껄껄."이라고 웃어넘긴다. 사실 그러는 수밖에 별 재간이 없다. 그냥 시골은 그런 곳이다. 온갖 종류의 불편함이 아주 당연히, 자연스럽게 여기저기 놓여있는 곳. 불편함을 불편해하는 게 도리어 어색한 곳. 그런 불편함도 쓸모가 있는 곳.


시골살이의 불편함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단순하다. 


모든 일을 내가 컨트롤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살면서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내 책임도, 잘못도 아니다.
그러니 나 자신을 괴롭히거나 좌절하지 말자. 


도시에서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시골살이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삶이 수월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조금 더,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 불편하더라도 그 불편함의 쓸모를 믿으며. 새로운 쓸모를 읽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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