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모르는 꽃을 위하여
제주의 (빌린) 집 마당엔 커다란 녹나무와 동백나무, 목련 나무가 한 그루씩 있고, 수십 그루 매실나무가 심긴 밭이 집을 감싸고 있다. 육지보다 따뜻한 날이 많아서인지 가끔 때 이른 꽃이 핀다. 지난봄에 흐드러졌던 목련은 깊은 가을에 접어들어 봉오리가 슬슬 여물어간다 싶더니 생뚱맞은 10월 중순에 몇 송이 꽃을 피웠다. 매실나무에는 1월 중순부터 뽀송한 팝콘 같은 매화가 보글보글 매달려 있다. 똑 따서 입에 넣으면 고소할 것 같은데 밭에 들어가면 가끔 까투리가 푸드덕 날아올라 놀라게 하니 포기하기로 한다.
때 이른 꽃을 본 사람들은 지구가 아프다고 말한다. 지구 온난화. 글로벌 이상 기후. 그렇지. 맞는 말이다. 나 또한 걱정이 된다. 아픈 지구도 그렇지만 미리 피운 꽃가지는 정작 저들의 '올바른 개화 시기'라는 봄에 빈 가지로 멀뚱하게 있어야 할 테니. 왠지 남들 다 필 때 혼자 초라하게 있으면 초조할 것도 같고, 조바심에 서둘러 영양분 끌어모으다가 또 남들 다 지고 난 가을에 생뚱맞게 혼자 또 피고 그러면 어쩌지. 그러다 영원히 남들과는 다른 박자로 살게 될 텐데...라고 속으로 쓸데없는 오지랖을 펼친다.
꽃이야 꽃이고, 사람이야 사람인데, 나는 여타 동물이나 사물보다 식물에 보다 동질감을 느낀다. 이름 중간글자 부수에 나무 목(木)이 있어서인가. 나무의 사주를 타고나서 그런가. 별명 중 하나가 뿌리 깊은 나무여서 그런가. 아무튼 난 식물과 인간이 여러모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생명 하나 자라지 않을 것 같은 보도블록 틈에서 움트는 생명력이라든가, 잡초나 웃자란 가지를 솎아주면 더 잘 자라는 성장성이라든가, 이런저런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눈부시게 만개하는 화양연화의 순간이라든가.
다른 점이 있다면 식물은 종류마다 개화 시기가 다르니 때 되면 어련히 피겠지 하게 되고, 같은 종 중에서 이르거나 늦게 핀 개체가 있어도 걔가 문제가 아니라 '지구가 아파요'처럼 주변 환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각기 다른 종으로 구분하지도 않을뿐더러, 보통의 생애주기에서 튀게 되면 환경 문제가 아니라 철 모르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기 일쑤다. 그 개인은 따가운 시선과 수군거림을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그렇게 된다. 타인이 일방적으로 타인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대부분 폭력적이니까. 누군가는 흘려듣겠지만 누군가는 가슴에 병이 든다. 남의 말을 하는 사람은 듣는 이의 성정까지 고려하진 않는다.
제철에 피지 않은 꽃이라고 유별난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때가 뜻밖이긴 하지만 그게 대수랴. 똑같이 예쁘다. 충분히 애썼다. 도리어 쉬이 핀 꽃이 어디 있을까 싶다. 피어야겠다고 느낀 순간에 피어난 것도 대견하다. 갑자기 날씨가 매서운 변덕을 부려도 다시 오므리느니 그대로 피어서 버티는 것도 멋지다. 뿌리, 줄기, 이파리는 안간힘을 쓰고 있겠지만 힘든 티를 내진 않는다. 마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강인한 사람처럼. 어쩌다 꽃을 샘내는 추위에 잎을 떨굴지언정, 미리 염려하지 않고 피어나는 무모함이 아름답다. 꽃은 꽃으로서 충분하다.
철 모르고 핀 꽃을 보면 그러려니 하고 예쁘고 대견하다 말해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걱정은 할 수 있지만, 공감 아닌 연민이라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에게는 더더욱 너그러웠으면 좋겠다. 피어나기 위한 조건과 때는 그 누구도(심지어 본인조차도) 잘 모르고, 타인의 묽고 얕은 말은 빛도 물도 양분도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올바른 개화 시기'라는 구절을 마음에서 지운다. 매일이 꽃 피우기 좋은 날이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