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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Mar 04. 2017

괜찮아, 실패해도

가끔은 필요한 용기의 방식

오늘도 실링 스탬프를 몇 개 찍었다. 제주에 와서 새로 생긴 취미 중 하나다. 영화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에서 서신을 보낼 때 심심찮게 등장하는 '밀봉의 도구'가 바로 그것인데, 있어 보이는 비주얼과 아날로그 감성 덕분에 이런 걸 선호하는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물건 순위 어디쯤을 꼭 차지하고 있다. 


하는 과정은 간단하다. 작은 스푼에 실링 왁스 서너 조각을 담아 티라이트의 열로 녹여 종이 위에 부은 다음 스탬프를 살짝 얹듯이 찍으면 끝이다. 사실 실링 왁스의 용도는 편지의 개봉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다. 편지를 개봉하면 점성이 있는 왁스가 종이와 함께 찢어지기 때문에 중간에 누가 뜯어봤는지를 바로 알 수 있다. 그래서 보안을 지켜야 하는 문서나 편지에 가문이나 지위를 상징하는 인장을 찍어 보내는 것이다. 


직접 해보니 평범한 편지도 특별하게 만들고 싶을 때 아주 효과적이다. 가끔 청첩장을 실링 왁스로 밀봉하는 분들이 계신데, 이런 청첩장을 받는다면 부디 신혼부부의 갸륵한 정성과 노고를 마음속으로 30초 이상은 치하해 주시길 바란다. 아무리 간단한 일이어도 몇백 번을 반복하는 건 얘기가 다르니 말이다.






아무튼, 원래 용도는 그렇다 한들 나는 편지를 쓸 일도 보낼 곳도 없으니 왁스가 쉽게 떼어지는 유산지에 부어 찍곤 한다. 앞서 간단하다 말했지만 사실 균일하게 찍기가 의외로 쉽지 않고, 왁스를 누른 스탬프를 급하게 떼어내면 덜 굳은 왁스의 테두리 모양이 망가지기도 한다. 그리고 불을 사용하는 일이라 고양이가 책상에 뛰어오르지 않도록 내내 조심해야 한다.


단순 작업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이 작업의 장점은 적당한 집중력과 길지 않은 기다림으로 꽤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인데, 내가 여기에 정을 붙인 이유는 따로 있다. 말하자면, '실패해도 괜찮아.'랄까.


진짜 종이 위에 찍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마음에 안 들게 나온 것은 다시 녹여 또다시 찍으면 된다. 안 예쁘게 나올까 걱정도 부담도 없다. 사실 찍을 때마다 모양이 다르고 '완벽'의 기준도 없어서 각각 다 나름의 멋이 느껴진다. 실패해도 괜찮기 이전에 실패랄 것도 없는 셈이다. 


물론 처음엔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모양이 동그랗게 나와야 하고, 인장 위치가 치우치지 않아야 하고, 기포가 없어야 하고, 색이 고르게 나와야 하고... 등등등. 하지만 작업을 반복하며 이 모든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결과물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결과물이 꼭 나올 필요도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 단순한 행위를 반복하며 내게 가장 필요한 주문을 외우곤 했다. '실패랄 것도 없지만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물론 세상만사에 다 갖다 댈 사례는 아니겠지만, 사람에겐 '아니다 싶으면 다시 하면 돼!'라는 막무가내 같은 용기가 가끔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다른 인생을 살게 하는 건 언제나 그런 방식의 용기였으니까.





문제는 그렇게 줄창 외우던 주문을 까맣게 잊는 순간이 많다는 것이다. 바로 손님들이 쓴 글을 담은 진짜 편지 봉투에 실링을 해야 할 때다. 작업실 이용 프로그램 중 마지막 과정인데, 손님들이 쓴 글 중 원하는 것을 골라 편지봉투에 담고 마음에 드는 실링 왁스 색깔을 고르면 나는 그걸로 봉투를 밀봉해서 손님에게 전해주는 작업이다.


마음 가는 대로 찍을 때와는 달리 손님이 누군가에게 선물하거나 본인이 간직할 거라 생각하면 언제나 나만의 완벽한 기준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모양이 동그랗게 나와야 하고, 인장 위치가 치우치지 않아야 하고, 기포가 없어야 하고, 색이 고르게 나와야 하고... 의 반복. 하지만 편한 마음으로 할 때도 나오지 않는 결과가 부담이 가득한 실전에서 나오기는 쉽지 않다.


나는 안 예쁘게 찍힌 것 같아서 다시 해드리겠다고 종종 울상을 짓는데, 대부분의 손님들은 웃으며 말한다. 


"이대로도 충분히 예쁜데요?"

"좀 비뚤어지면 어때요, 이게 멋이죠." 


그렇게 그들의 말 한마디로 실패가 실패가 아닌 게 되는, 실패랄 것도 없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아아,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저는 오늘도 당신들에게 구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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