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의 저변에 깔린 배려
흔히 북유럽을 생각하면 금발의 파란 눈을 한 백인들만 떠오른다. 나 역시 그랬고, 그래서 스웨덴에 갔을 때 가장 놀랐던 점은 생각보다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심에서는 약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에어비앤비 숙소 근처에는 여기가 스웨덴이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히잡과 부르카를 두른 아랍 사람들을 포함해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많았다.
북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이민을 잘 안 받아주는 편인데 난민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포용해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난민 출신 이민자들이 많다. 시리아 난민을 받아준 것도, 난민들이 가고 싶어 한 곳도 대체로 북유럽 국가들이었다. 물론 지금은 포화상태가 되어 더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규제를 하는 방향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어느 국가나 다민족 국가가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출산율이 저하되는 상황일수록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추세이다. 북유럽 국가들 역시 이런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이민자에 대한 처우를 적극적으로 신경 쓰는 편이다.
한 스웨덴 친구의 말에 따르면 학교에서 급식으로 나오는 음식에 이슬람교를 배려하기 위해서 돼지고기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인종차별이라든가 특정 문화를 비하하는 문제 등에 대해서 매우 엄격하여 '말괄량이 삐삐'에서 '우리 아빠는 검둥이들의 왕이야'라는 말 역시 최근에 와서 삭제했다고 한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과한 것이 아니냐는 반발도 있다고 한다.
이민자에 대한 북유럽의 정책은 지금까지 성공적인 케이스라고 본다. 현재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와 관련된 문제들이 이민자들의 사회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와도 상당한 관련이 있다. 벨기에와 프랑스의 경우 사회에서 배제된 이민자들의 후손들이 외로운 늑대가 되어 테러를 일으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북유럽에서는 테러를 일으키기 위해 숨어든 경우가 아니라면 자생적 외로운 늑대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역시 전통적으로 한민족, 하나의 단일 민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농촌에는 인력 부족으로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신부를 구해온 다문화 가정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비단 농촌뿐만이 아니라 공장 근로자들을 포함해 도시에도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이 거리를 걷다 보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든가 제도적인 문제들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통칭 '다문화'라고 불리는 가정에서는 주로 부모님 중 어머니 쪽이 다른 국적 출신인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주 양육자인 어머니의 언어를 따라가게 되는데 어머니가 한국어를 잘 못 할 경우, 아이들 역시 한국어를 습득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그것은 학교에서 학업 성적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적응에 문제를 낳는다. 그래서 '다문화'라는 용어가 하나의 비하어로 놀림감으로 쓰이기도 한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중국 사람을 '짱깨'라고 부르는 것이나, 흑인을 '흑형', 일본인을 '왜놈', '쪽발이'라고 부르는 언어습관 역시 너무나 흔하다.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보고 눈을 옆으로 찢는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고 해도 당하는 사람은 기분이 나쁜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것에 대한 혐오는 결국 그것 하나에 그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장 정도가 약한 것이 무관심이고 그게 나아가 차별을 옹호하는 것 혹은 긍정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이상의 폭력으로 굳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요즘 인터넷 등을 보면 누군가를 '충'을 붙여서 벌레처럼 경멸하는 사람들이 많다. 엄마는 '맘충', 학생들은 '급식충', 노인들은 '틀딱충', 보다 보면 세상에 정말 별의별 '충'이 다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사람들은 모두가 벌레가 되어 있다. 물론 일부의 무개념 한 사람들도 있지만, 어느새 그 일부를 비하하는 말은 그 전체 집단을 비하하는 말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벌레라고 부르면 머릿속에서는 그들을 벌레로 인식한다. 그 생각의 중심에는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이 있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에 대한 관심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각할 가치가 없는 벌레이기 때문이다. 혐오하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는 사람은 무의식 중에라도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고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동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랜 시간 단일성을 강조해온 한국사람들에게 다민족, 다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조건이 다르니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무리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우리 안에 포용하기 위해서 북유럽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무의식 중에 깃들어 있는 혐오와 차별을 덜어내기 위해서는 어쩌면 조금은 극성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의 조심성이 동반된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북유럽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대개 모든 식당에서 채식주의자를 위한 비건 메뉴가 하나씩은 있는 편이라고 한다. 고기나 어떤 것을 못 먹더라도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내 주위에는 완벽한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채식주의에 가깝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갈 수 있는 식당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매우 한정적이다. 회식 등 단체 생활을 할 때 그들의 식성은 대체로 고려되지 않는다. 그들이 회식을 하는 고깃집에 가서 먹을 수 있는 건 밥과 잘하면 반찬, 아니면 보통 김치나 구운 양파나 버섯 같은 것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똑같은 회비를 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애초에 선택할 것이 없는 선택지에서 선택하라는 강요는 폭력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적이라든가 외양이 굳이 다른 문화권의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각자 다른 개개의 문화를 가지고 살아간다. 알레르기가 있어서든 원해서든 원하지 않아서든 먹지 않는 음식이 있을 수 있고,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을 수 있다. 삶의 양식이란 것은 결국 자신의 역사를 반영한다. 채식주의자이든 아니든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집단 속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는 쉽게 묻혀버리곤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생각하길 귀찮아하고 피곤한 존재로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 이야기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을 팻말처럼 붙이고 다닐 수 없는,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엄연히 존재하고 무시할 수 없는 특성이다. 존재의 양식을 부정당하는 것만큼이나 괴로운 게 있을까?
타자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은 자신과 타자의 다름을 인지하고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도 남과 완벽히 똑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와 독특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개별자이다. 그렇게 볼 때 결국 타자의 다름을 존중하는 것은 타자와 다른 나의 다름도 존중해달라는 무언의 몸짓이 아닌가 싶다.
좋아하는 영화 중에 '원더'라는,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가 있다. 태어났을 때부터 남다른 외모 덕에 수술을 27번이나 했지만 여전히 그의 남다름이 눈에 띄는 탓에 헬멧을 쓰고 다니는 한 소년이 있다. 영화는 그 소년이 헬멧을 벗고 학교에 가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그중에서도 내 마음에 남았던 부분은 그 소년이 있는 반의 급훈인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땐 친절함을 선택하라."였다. 가끔은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 그의 다름에 대해 어떤 많은 것을 묻지 않고도 별 다를 것 없이 대해주는 게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달라서 유별난 것이 아니라 그도 자기도 모두 다양한 존재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따스한 배려가 눈빛과 말투에 깔려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