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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Apr 20. 2024

느리게 성장하기

나는 발달장애아동의 일상생활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픈 아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G와 E를 처음 본 건 1년 전 발달장애 아동을 위한 치료 센터에서였다. G는 하체의 힘이 약해서 제대로 서지 못했고 E는 까치발로 콩콩 뛰듯이 걸어 다녔다. 내가 활동 지원하는 아이와 G와 E가 같은 시간대에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두 아이의 처음 모습이 유독 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가장 몸이 약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내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 일이 바빠서 다른 아이들을 눈여겨볼 틈도 없이 1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러던 중 얼마 전이다. G와 E를 차분한 분위기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몸이 훌쩍 자라 있었고 많이 안정된 모습이었다. 키가 컸나, 살이 올랐나, 무엇이 달라졌나, 살펴보게 되는 단단함이 있었다. 1년 전의 주저앉은 상태로 바닥에 엉덩이를 밀며 이동을 했던 G가 이제는 제법 꼿꼿하게 일어서서 걸었다. 까치발로 걷던 E는 발바닥을 평평하게 디디며 안정되게 걷고 있었다. 두 아이는 키도 많이 자라서 건강해 보였고 다리의 힘도 단단해 보였다. 특히 G가 엄마의 손을 잡고 치료실을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기적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를 두고 주변에서는 G 엄마의 정성이 대단했다고 했다. G의 엄마는 장 거리에도 날마다 G를 치료실에 데리고 다녔다고.

그러고 보니 G와 E만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치료실에 다니는 아이들은 1년 전의 모습보다 분명 몸도 마음도 튼튼해졌고 성장해 있었다. J엄마는 신변처리를 하지 못했다던 자기 아들이 이제는 신변처리는 물론 샤워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뿌듯해했다. 발달장애아에게 이와 같은 성장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내 일처럼 기뻤다. 각고의 노력과 인내의 결과라는 것을 알기에. G의 엄마뿐 아니라 치료실에 다니는 모든 아이들의 부모는 정성과 헌신을 다한다. 그것은 부모가 아니라면 하지 못할 숭고한 희생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몇 가지 이유로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중 한 가지는 아이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좋아졌다 싶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경험들을 반복해서 겪었다. 매일 치료실을 다니며 체육치료, 감각치료, 인지치료, 행동수정을 위한 교육을 시켰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 모습을 볼 때면 기운이 빠졌다. 아이의 부모 마음은 오죽할까 싶어 안타까웠다. 가끔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못하겠다며 우울해했다.

이렇게 낙담에 빠진 날이면, 치료 선생님께 꼭 듣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지 말고 1년 전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그때보다는 훨씬 좋아지지 않았나요?” 

정말 그랬다. 어제와 오늘의 아이의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1년 전과 지금의 아이의 모습은 달랐다. 문제성 행동이 줄었고 언어표현이 그때보다는 나아지고 있었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활동 지원하는 아이도, G와 E도 느리지만 성장하며 자신들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대로 성장이 멈춰 선 것 같았던, 그리고 멈춰 설 것 같았던 아이들은 매일매일 자신의 호흡대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욕심부리지 않고. 자기만의 속도대로. 그렇지만 꾸준히.

나는 지금 글쓰기 훈련 중에 있다. 이 아이들처럼 나의 어제와 오늘도 별반 차이가 없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일 것 같은 답답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더 힘차게 더 높게 뛰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나의 욕심일 뿐이다. 지금 나의 발걸음은 아주 미약하다. 하지만 삶을 꼭 많은 성장을 바라며 눈에 띄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낡았더라도 내게 맞는 옷을 입어야 편안한 것처럼, 잘 사는 삶이란 거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발자국을 만들며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키가 작고 발이 작으니 작은 보폭으로 작은 발자국을 내며 걷기로 했다. G와 E처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걷기로 했다. 나는 어제의 걸음이 초라할지라도 오늘을 꾸준히 걸어 내일을 만들어갈 것이다. 느리게 가면 어떠하리. 오늘도 내일도 꾸준히 걸으면 된다. 혹여 제자리를 걸으면 어떠하리. 제자리를 걸어도 다리의 근육은 만들어진다고 한다. 지금의 나는 오늘과 내일의 나보다 1년 후의 나를 상상하며 느긋하게 걷고 싶다. 그러나 꾸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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