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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Apr 20. 2024

우리는 아고라에 함께 입장할 수 있을까?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익명의 다수가 시선으로써, 말이나 행위로써, 혹은 직접적인 방해나 법적 수단을 통해 그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존재들을 단속하는 데 동참한다. 입장할 자격 없이 공공의 공간에 침범한 사람, 거리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추방하거나 교화시킨다. 이런 시선의 익명성과 편재성 때문에, ‘낯선 존재’인 소수자들이 느끼는 일상의 시선 혹은 ‘감시’의 압박은 삶을 만성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때로 소수자가 스스로 숨어 있기로 결정한다.”<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 중에서>   


  Y의 가족은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여행, 대중교통 이용하기, 문화생활, 외식하기 등 모든 일상에서 제약을 받는다.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고 소란을 일으킬까 봐 외출을 삼간다. 그래서 Y는 조용해 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세상에 길들여지는 훈련을 받는다. ‘나’를 지우고 ‘우리’가 되는 훈련.

코로나19 이전, 대부분 사람들은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마음도 몸도 날개를 단 듯 가벼웠다. 반면, Y가족은 사람 많은 곳이 불편했다. 통제가 잘 되지 않는 Y의 돌발행동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전염병으로 인해 거리의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사람들은 집안에 숨어들었고 집안에서 주로 숨어 지냈던 Y는 거리로 나왔다. Y가 사람 없는 거리를 당당하게 걷는다. 비로소 공공의 특권을 누린다. 땅바닥에 누워 난장을 부린다 해도, 큰 몸짓으로 소란을 피운다 해도 타인들의 불편한 시선이 줄어서 좋다. Y와 우리는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고 공원을 자유로이 누빈다.

거리는 비장애인이 만들어 놓은, 그들에게만 당연한 풍경들로 가득하다. Y가 마음 놓고 갈 곳이라고는 치료실이나 병원, 인적이 드문 산과 공원이 고작이었다. Y처럼 몸짓이 크고 자유로운 영혼은 일반화된 시선에 막혀 공공의 공간에 입장 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Y의 아고라 등장을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Y의 큰 몸짓과 목소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안하기만 하여 자꾸 움츠려든다. 그래서 우리는 Y를 조심시키고 또 조심시키려 노력한다. Y를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최대한 보이지 않도록 애를 쓴다. 사람들의 시선의 압박으로 인해 Y는 물론, Y와 함께하는 우리의 삶이 만성적으로 위축되고 피로해 진다.

나는 이 피로함의 근원, 분리된 교육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분리하여 교육을 한다. 보통 중증장애 아이들은 특수 학교에 다니고 경증장애 아이들은 일반 학교의 특수반에 다니게 된다. 그리고 또 특수 학교에 진학을 원하는 장애 아이들이 특수 학교 부족으로 일반 학교로 진학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 교육 구조에 한해서는 경증장애 아이들은 일반 학교에서 비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사회성이 현저히 좋아지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중증장애 아이들에게는 비장애인 아이들의 수준에 맞춰진 일반적인 통합 교육이란 것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만약에 일반 학교에서의 통합 교육이 장애 아이들의 수준으로 이루어진다면 괜찮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장애인 친구들이 원한다면 당연히 언제든지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중증과 경증으로 장애를 나누고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현 교육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울타리에 특수학교와 일반학교가 공존하는 형태의 통합학교가 우리 사회의 통합적 사회구조를 위해서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가장 자연스러운 통합적 사고 형성을 위해서다. 자주 보고 익숙해지면 모든 것들이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이런 교육 구조는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공공의 교육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 우리 사회의 교육 목표가 ‘경쟁과 성공’이 아니고 ‘모두 함께’ 라면, 우리 사회는 어땠을까?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우리는 장애인 비장애인이 함께 사는 연습을 학교에서부터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과정을 통해 비장애인 친구들은 장애인 친구들에게 양보와 배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배울 테고 장애인 친구들은 사회성이 좀 더 넓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문턱이 없는 사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장애인들도 문밖의 삶에 익숙해져 살고 있지는 않을까? 어릴 때부터 ‘누구라도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을 키워준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지금의 낯선 시선 따위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이미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을 테니까. 

장애아이를 둔 부모들의 가장 힘든 점은 사회성 키우기와 이방인을 보는듯한 낯선 시선이라고 한다. 우리가 처음부터 함께 생활하면서 익숙했더라면 장애인 친구들의 사회성이 현저히 좋아질지도 모르겠다. 이미 낯선 시선들의 압박에서 해방되어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평등이란 ‘아고라에 모든 사람이 함께 입장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라 한다. 우리는 지금의 이 철벽 같은 경계를 허물고 모두가 아고라에 함께 입장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생각이 깊어진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낯선 시선들을 거두어 이들이 소수자가 되어 스스로 숨어드는 결정을 하지 않는 사회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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