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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Apr 20. 2024

탈 시설이란

 ‘어른이 되면’ 프로젝트의 목적은 장애인도 ‘탈 시설’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인격체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인식개선이 꼭 필요하다는 절실을 호소하는 데 있다. “탈 시설이란, 장애인 생활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이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 통합되어 개인별 주택에서 자립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정의된다. 장애인이 시설에서 산다는 의미는 폐쇄성이다. 시설에서의 삶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자유가 제한된다는 것에서부터 문제가 발생된다. 이에 ‘탈 시설’은 사회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살아가는 것,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스웨덴은 1980~1990년에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생활을 위한 구체적 서비스를 지원, 확대 하였고 1997년 ‘특수병원 및 요양시설 폐쇄법’을 통과시켰다. 1999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모든 시설은 폐쇄되었고 시설 중심의 서비스에서 지역사회에 기반한 서비스로 전환되었다.

스웨덴의 탈시설을 주도한 사람은 킬 그룬빌트 박사이다. 그룬빌트는 스웨덴 보건복지부 공무원으로 거주시설과 전문병원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며 발견했던 시설들의 폐해를 지속적으로 알려왔다. 그는 시설에 사는 장애인들의 자유가 없는 삶에 더한 학대와 폭력, 그리고 비윤리적인 의료실험을 폭로하며 탈 시설 여론을 형성해 갔고 인권운동가와 정치인들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지금은 각자의 니즈에 맞는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매월 지급되는 지원금을 모아 세계여행도 갈 수 있을 정도의 탄탄한 복지가 마련되었다고 하니, 우리가 이런 사회로 가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성숙된 인권의식이 고양되어야 할까.

또한 영국은 1980년대 후반부터 탈시설 정책을 논의하다가 1997년 ‘지역사회돌봄법’을 제정해 장애인에게 서비스 대신 현금지급을 허용했다. 이로써 장애인 당사자가 복지 서비스를 통제하고 결정권을 가지는 게 가능하게 됐다. 뉴질랜드 또한 지역중심의 서비스를 선택하고 2006년 모든 시설을 폐쇄했다.

우리나라는 2007년부터 장애인활동지원 서비스를 도입했다.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는 사회기반을 만들고 부양자의 쉼을 위해서다. 장혜영 작가는 이 시스템이 좀 더 빨리 생겼더라면 동생이 시설로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요즘 환경이라면 혜정 같은 경우엔 얼마든지 집에서 케어가 가능하다. 더 심한 장애인들도 대부분 집에서 케어를 한다. 지금은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치료 바우처 등 국가 차원의 지원이 증대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엔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것들을 점차 사회가 책임지는 추세이며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장애인 복지정책에 대한 방향성은 아직 사회적 논의가 더 필요해 보인다.

탈 시설의 문제가 그렇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장혜영 작가를 비롯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라는 장애인 인권단체에서 탈 시설 운동을 펼치고 있다. 정부는 장애인 시설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지만 탈 시설 시 발생할 문제들을 우려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경제적 문제와 관계가 깊다. 또 일자리를 잃게 되는 시설 사업주와 직원들의 반발과 불안한 미래로 인한 장애인 부모들의 반대도 있다고 한다. 부모들은 ‘시설이 없다면 인지력이 부족한 장애인들이 아무런 연고지가 없을 때 어떤 보호 아래 살게 될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러나 스웨덴은 반대로 장애인 탈 시설의 문제를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해결했다. 법을 제정하여 강하게 밀어붙였다. 폐쇄하지 않는 시설은 국가가 사들여 폐쇄했다. 정부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일이다. 약자에 대한 배려가 당연한, 인간적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여론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사회는 배려있는 소수의 사람의 희생 속에 세워진다.      

나는 수어통역사 장수미를 알고 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청각장애인 미혼모를 돕고 있다. 당시 혼자 사는 것도 망막했던 미혼모는 아이를 낳자 시설로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장수미는 자신이 도와줄테니 아이를 직접 키워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을 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장수미는 11년째 미혼모와 아이를 옆에서 돕고 있다. 언어소통이 되지 않으니 병원 가는 일, 학교 문제 상담, 이웃들과 함께 여행하기, 각종 사회지원 서비스  정보나 방법 등을 일일이 챙기며 모녀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나는 얼마 전에 모처럼 장수미를 만나 점심식사를 했는데 그녀는 그날도 아이 엄마와 소통하느라 바빴다. 아이의 학교에 낼 서류를 챙기기 위해서다. 장수미는 아이 엄마와 문자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자 수어로 화상대화를 시작했다. 아름다웠다. 말은 상처가 되기 쉽거늘 손으로 하는 대화는 마치 나비의 춤사위와 같았다. 천사의 날개 같았다. 수어는 나비의 춤일까. 천사의 언어일까.

나는 장수미에게 본인의 아이들 셋을 양육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도울 수 있었냐고 물었다. 11년 전이면 내 아이들도 장수미 아이들도 초등학생때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넋이 빠져 힘들어하고 있을 때였다. 이에 대해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사람들과 연결해주는 역할만 했어요. 아이한테 잘해주는 타입은 못돼요. 우리 가족과 마을의 이웃들을 하율과 연결해줬을 뿐이에요. 그러면 알아서들 서로 잘 놀아요.”      

이 쿨내 나는 대답이라니. 연결만 해주었더니 마을 사람들이 알아서 잘 놀더라는 경험담이 진짜 마을 운동가의 정신이 아닐지 생각게 했다. 사회운동에 있어 주도자가 모든 걸 완벽하게 다 해내야 된다는 부담감을 극복한 정수의 논리. 또한 장수미는 자신의 말로 발목이 붙들인것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을 했지만 그 속을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내 삶도 벅찬 세상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장수미는 나에게도 그 잔잔하고 깊은 속을 들켜버렸다.

나는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 곧 장혜영 작가의 프로젝트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장수미는 하율이에게 자신의 이웃을 나누었고 평범한 일상을 선물했다. 장혜영 작가가 그토록 원했던 일, 장애인에게도 일상의 자유를 선물하는 것, 장애인 탈 시설화의 비법이 장수미에게 있었다.

혜정의 탈시설 생활은 언니 혜영의 희생이 있어 가능했다. 장혜영이라는 오작교를 통해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정민, 은경, 인서, 든든한 동생들이 혜정에게 노래도 가르쳐 주고 함께 여행도 했다. 그리고 동네 카페 사장님, 음식점 사장님과 친구가 되어 혜정을 배려했고 아껴주었다. 그런 연결을 통해 혜정은 싫은 것 거부하기, 자신이 원하는 것 요구하기, 하고 싶은 것 해보기 등 자기결정권을 갖기 시작했다. 혜정은 이제 폐쇄된 공간에서 폐쇄적인 사람들에게 듣던 ‘어른이 되면 할 수 있어’ 란 말을 멀리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의 사회시스템은 누군가의 배려와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장수미와 장혜영 작가처럼.

그렇다면 사회는 늘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존재되는 것일까. 혹은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시스템은 작동이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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