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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Apr 24. 2024

내 직업은 커밍아웃이 필요합니다

내 직업은 커밍아웃이 필요합니다


전직도 별 볼일 없는 나인데 내가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고 하니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그 일은 어떻게 하게 되었어요?” 한 술 더 떠서 내가 무안해 할까봐 옆에서 대신 대답해주는 사람도 있다. “아~, 사회복지의 개념, 봉사의 의미인거죠?” 오… 이런…, 졸지에 봉사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될 뻔 했다. 그러면 나는 얼른 대답을 한다. “경제적인 이유에요!”

나는 노총 지역 사무국에서 7년을 비정규직으로 버티다가 퇴사를 했다. 1년 정도 놀다보니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두 아들의 유학문제 때문이었다. 남편이 아이들 유학 계획을 세운 것은 내가 회사에 계속 다닐 것이라는 전제하에서였다. 쥐꼬리 만큼의 내 월급도 우리 가정 경제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형편에 덜컥 퇴사를 한 내가 남편의 눈치를 아니 볼 수 없었다. 또 아이들 유학으로 부담이 커진 우리집 경제 사정에 남편만 바라보고 살기에 눈치가 조금(?) 아니 많이(!) 보였다.

그런 와중에 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배리어프리 여행” 프로그램에 동참을 하게 되었고 이 직업을 알게 되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봉사를 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친구가 되어 함께 놀아 보자’라는 의의를 가진 여행이었다. 이들과 두 차례의 여행을 하면서 어느새 장애인은 내게 낯선 존재가 아니라 친근한 친구로 다가왔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그 즐거웠던 여행은 그 다음 해에도 계속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했던 여행의 경험이 깊은 울림이 되어 장애인 친구들에 대한 연민으로 이 일을 시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작 두 번 봐놓고선 그들과 함께할 자신감이 생겼고 누구에게도 내가 이 일을 한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도 당시 나는 이 일을 평범한 직업이 아니라 고매한 봉사로 생각을 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크나큰 자만이란 걸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나는 처음의 각오와 생각대로 내 직업이 장애인 활동지원사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추락하는 못난 자존감 때문이었다. 왜 자꾸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데리고 다닐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은근 신경 쓰였다. 누군가에겐 측은한, 동정의 대상으로 비추어 지기도 했다. 이처럼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내 마음을 자꾸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어디에서 건 힘의 논리에 따라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약자 아래 또 다른 약자가 바로 돌봄 노동자였다.

그렇더라도 나는 요즘 지인들에게 내 직업을 커밍아웃 하고 있다. 몇년 째 이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조금은 이 일에 대한 자신감이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커밍아웃을 하자, 역시나 상대도 나도 미묘한 마음들을 주고받곤 한다. 나의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지만 직업에도 커밍아웃이 필요한 직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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