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재 May 10. 2020

뉴요커들은 이 코스로 데이트를 한다고요

2018. 11. 2. 열두째 날

 18박 19일의 여행을 떠난다면, 여러분은 몇 벌의 옷을 가져가시겠어요? 설마 18벌을 가져가겠다고 대답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짐은 점점 늘어날 테고, 옷이 부족하면 현지에서 사면되니까요. 옷을 살 시간과 돈이 부족하다고요? 손은 뒀다가 뭐하겠어요. 더러워진 옷은 빨면 되죠. 오히려 옷을 한 벌도 가져오지 않는 편이 좋을 수도 있겠네요. 여행의 꽃 중 하나가 쇼핑이잖아요. 빈 가방을 새 옷들로 채워가면 기분이 아주 좋을 거예요. 하루에 한 벌씩 옷을 갈아입기 위해 18박의 일정 동안 18벌의 옷을 가져가는 여행 초보이자 바보 멍충이가 바로, 네. 접니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다음 숙소로 이동하기 전에 한국으로 짐 좀 부치고 올게요. 가방이 안 닫혀."

"아이고, 뭔 옷을 그리 많이 가져왔냐?"

"아빠랑 예쁜 사진 많이 남기려고 색깔별로 가져왔지. 남는 건 사진밖에 없는데."

"그건 나 안 닮았네. 난 옷 욕심이 하도 없어서 군복에 까맣게 물을 들여서 입고 다녔다."

"그건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구질 구ㅈ... 네! 검소하셨네요! 어쨌든 저는 한인 타운 좀 다녀올게요."


 왜 한인 타운이냐 하면, 한인 택배가 UPS나 Fedex보다 빠르고 편리하고 싸기 때문이다.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올 때 유용하게 사용했던 기억이 나서, 옷가지를 비롯한 기념품과 선물들을 꽉꽉 눌러 담은 여행 가방을 둘러메고 한아름 마트 3층으로 향했다.


"계세요?"

"네, 들어오세요."


 10평 남짓 해 보이는 자그마한 사무실 문을 살며시 열고 고개를 들이밀자, 까까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친절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피곤한 기색이 서린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짐 좀 부치려고요. 여행 왔는데, 짐이 너무 늘어서 캐리어에 다 들어가질 않네요."

"네, 여기 박스 안에 잘 정리해서 넣어주시면 무게 달아 드릴게요. 혼자 여행하시는 거예요?"

"아빠랑 같이 왔어요. 실은 제가 한 10년 전쯤에 여기서 학교를 졸업했거든요. 근데 정작 그때는 제대로 구경도 못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린 거 있죠? 아쉽기도 하고, 아빠 칠순 여행 기념해서 겸사겸사 모시고 왔어요."

"효녀시네. 저도 여기 온 지 10년 짼 데, 여기 바로 앞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있잖아요. 글쎄 그 앞을 맨날 지나다니면서도 한 번을 못 올라가 봤어요. 한국에서 누나랑 가족들 왔을 때 전망대 표 한 번 끊어 줘 보고. 그게 참 그렇게 되네요."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의 열정이 무색하리만치 눈앞의 명소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 현지인의 삶이란 그렇다. 아니,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그렇다. 늘 곁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대상에 대해서는 모두가 매한가지다. 가족, 시간, 직장, 건강, 젊음.. 평소에는 한없이 소홀히 대하다가도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음을, 그러니까 언젠가 끝나버릴 자원의 유한함을 깨닫고 나면 태도가 돌변한다. 세상에서 가장 만만하고 하찮았던 것들이 갑자기 애틋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퇴사일이 결정된 순간, 그토록 싫었던 출근 길가에 핀 꽃 한 송이가 불현듯 눈에 들어오면서 아름답다고 느꼈던 경험이 다들 한두 번쯤은 있을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실제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각만 달라졌을 뿐. 그러니 결국 죽음과 이별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행복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기 위한 필요조건일 수도 있겠다.


 원래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가려했지만, 시간이 애매해서 나중으로 미루고 대신 뉴욕의 허파라 불리는 '센트럴 파크'에서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아무런 배경 지식도 없이 뉴욕 지도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맨해튼 섬 중앙에 놓인 커다란 녹색 직사각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을지도 모른다. 160년 전에 약 1백만 평의 규모로 16년이나 걸려서 만들었다고 하니, 그 끈기와 인내심, 무엇보다도 가장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곳 한가운데에 거대한 녹지를 조성하겠다는 아이디어와 결단력은 존경스럽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러브 인 맨해튼(원제: Maid in Manhattan)'이라는 영화에서 처음 본 센트럴 파크의 인상은 강렬했다. 벤치에 앉아서 꽁냥 거리는 주인공들보다도 인라인이나 자전거를 타면서 분주히 움직이는 주변 사람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공원이 얼마나 크길래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학교 운동장이 아니면 (지금은 사라진) 여의도 광장에서나 마음 놓고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지금도 작정하고 한강을 가지 않는 이상 서울 한가운데서 자전거를 타고 신이 나게 달릴만한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영화 속 배경에는 짙은 녹음이 가득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만 빙글빙글 도는 것에 지루함을 느끼던 차에, 저토록 아름답고 공기 좋아 보이는 평지에서 나도 언젠가는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보리라 다짐했었다. 결국 32년 만에 소원 성취하는 날이다. 아빠와 함께일 줄은 몰랐지만.


 잔디밭에서 먹을 햄 치즈 베이글 도시락과 뜨거운 된장국까지 바리바리 싸서 배낭에 넣고, 가이드북에서 본 렌탈 가게로 가서 여권을 맡기고 자전거 2대를 빌렸다. 1시간에 $14. 조금이라도 늦으면 추가 요금이 발생한다고 했다. 1시간이면 충분하지 뭐. (네.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꼭 2시간 빌리세요.) 자전거 여행은 콜럼버스 서클에서 시작됐다. 날이 조금 흐린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꿈꾸던 그대로였다. 알록달록한 단풍나무를 양옆에 두고 바람을 가르면서 씽씽 달리다가, 호수가 나오면 잠시 멈춰 사진도 찍고 하다 보니.. 벌써 30분이 지나버렸네?


"아빠, 조금 서둘러야겠어요. 돗자리 펴고 도시락도 먹어야 한단 말이야."

"여기서 후딱 먹고 가든지."

"원래 가려던 데가 있는데.. 잔디밭 광장이 어디더라.. 에이, 못 찾겠다. 아빠 말대로 그냥 여기서 먹어요, 우리."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면서 먹고 마시고 낮잠이라도 한숨 잘 수 있는 점심시간을 꿈꿨건만, 현실은 삭막한 아스팔트 도로 옆 울타리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허겁지겁 먹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역시, 예측한 대로 다 이루어지면 여행이 아니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황급히 음식물을 목구멍으로 집어넣고 난 뒤 다시 자전거 안장에 올랐다. 괜찮아. 아직은 여유 있어. 여기서 이쪽으로 가로지르는 길을 찾아서 여기로 저기로 가면.. 어라? 이 길이 아닌가? 맞는데? 이 길이 왜 막혀있지?


"저기요, 말씀 좀 여쭐게요. 이 길로 지금 못 지나가나요?"

"오늘은 안 돼요. 내일모레 열리는 마라톤 대회 준비 때문에 막혔어요. 저기 저거 보이죠? 무대 설치하고 있는 거."


 망했다. 자전거 도로는 일방통행이라서 이 길로 못 가면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데, 반납 시간은 20분밖에 남지 않았고 구글 맵으로 찍어보니 목적지까지 40분은 족히 걸린단다. 어쩔 수 없지.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아빠,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냐?"

"내일 있을 행사 때문에 원래 가려던 길을 막았대요. 한참을 돌아가야 해. 중요한 건, 시간이 없어서 빨리 달리셔야 해요."

"알았다. 월남전 용사가 그까짓 자전거쯤이야. 한 번 달려보지 뭐."

"그때가 한 50년 전이라는 건 감안하시고.. 그럼 제 뒤만 잘 따라오세요. 파이팅!"


 그렇게 광란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이날 시속 40km로 미친 듯이 달리는 두 동양인 부녀를 보셨다면 아는 척 좀 해 주세요. 센트럴 '파크'니까 평지로만 이루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여기 언덕배기가 왜 이렇게 많아!? 평소에 꾸준히 자전거를 타 왔던 것도 아니고, 운동할 몸과 마음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터라 한 10분쯤 지나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이 정돈데, 아빠는 살아계신 지 모르겠네. 뒤를 돌아보니, 자전거를 힘겹게 끌면서 따라오는 아빠가 보였다.


"괜찮으세요? 그냥 천천히 갈까? 돈이야 더 내면 되지 뭐."

"아니, 내가 왜 너보다 느리냐?"

"예?"
"내가 남자고, 넌 여자인 데다가 어떻게 아빠가 돼서 딸한테 지냐? 나 원 참.."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연히 내가 빠르지! 아빠가 나보다 2배는 더 살았잖아. 몸은 쓰면 쓸수록 고장 난다고요."

"야, 뭔 말을 또 그렇게 하냐? 고장이라니!"

"아빠가 고장 났다는 게 아니고! 세월을 역행하려는 분이 바로 여기 계셨네. 아빠 이러는 거, 자연의 순리에 반하는 거예요. 아빠 좌우명이 '다웁게 살자' 아니에요? 거 아실만한 분이 왜 이러셔."

"자존심 상하네. 너한테 지는 날이 오다니. 너 요만했을 때는 내가 너보다 훨씬 빨랐는데."

"어휴, 그거 20년 전 얘기 아니에요? 일단 이러고 있을 시간 없으니 잠시 숨 좀 돌리셨으면 다시 출발하시죠."

"알았다. 앞장서라."


 또다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한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누가 소리를 치면서 내 앞을 스쳐 지나간다.


"유격! 유격!"

"아빠!!!!"

"나 아직 안 죽었다. 빨리 잘 따라와라. 너 왜 이렇게 느리냐?"


 못 말려 정말. 굳이 딸을 이기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유격'을 외치며 달리는 70세 할아버지의 투지가 밉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자식에게 등대의 역할을 해 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뭐든지 알려주고 싶고, 자식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볼 바에는 차라리 당신이 먼저 그 길을 가 보는 것이 속 편한 부모의 마음.


 최대한 빨리 달렸지만 10분쯤 늦어버렸는데도 불구하고, 가게 주인은 추가 비용을 청구하지 않았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 인사 전합니다. 복 받으세요. 신나게 체력 소진했으니 이제 먹어야지. 대미를 장식할 오늘의 마지막 코스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딤섬 맛집인 Joe's Sanghai다.


"짠!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차이나타운! 아빠가 좋아하는 중국을 고스란히 옮겨 놨죠! 어떤 사람은 진짜 중국보다도 여기가 더 중국답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네. 중국인들이 빨간색을 좋아하는데, 거리가 온통 빨간 걸 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골목골목을 돌아서 식당 앞에 도착하니 명성에 걸맞은 대기자 명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대기 줄이 있으면 기다리지 않는 편이지만,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은 예외다. 장사에 능한 중국인들의 가게는 회전율이 높아서 금방 자리가 나기 때문이다. 역시, 10분도 채 기다리지 않았는데 벌써 우리 차례가 됐다. 안으로 들어가니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들 만큼의 간격으로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촘촘히 놓여 있었다. 종업원은 인원수에 맞게 빈자리를 퍼즐처럼 채워 넣었다. 역시, 이러니 회전율이 높을 수밖에 없지.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한 테이블에 다닥다닥 둘러앉아야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긴 원래 이런 곳이니까.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뉴요커들은 이 또한 글로벌한 미식 경험의 하나로 치는 것 같다.



"이 식당은 소룡포(小籠包)가 유명하니까, 이걸 꼭 먹어야 해요."

"네가 잘 아니까 마음대로 시켜라. 근데, 용 어쩌고 가 뭐냐?"

"헐. 소룡포 모르세요? 만두 같은 건데, 안에 육즙이 가득 차 있는 국물 만두야."

"몰라. 안 먹어 봤어."

"중국 가서 뭐 드셨대? 먹는 방법 알려 드릴게요. 먼저, 여기 이 숟가락 위에 소룡포를 하나 올려놓고 젓가락으로 만두피를 조금 찢어요. 그러면 안에 있는 육즙이 주르륵 흘러나올 거 아니에요? 그걸 호로록 마시는 거지. 그다음에 나머지를 드시면 돼요. 왜 이렇게 먹느냐 하면, 안에 있는 국물이 엄청나게 뜨거워서 입안을 다 데는 수가 있거든. 처음에만 이렇게 드시다가, 음식이 식으면 한입에 넣고 드셔도 돼요."

"알았다."


Joe's Sanghai

 

 소룡포를 처음 드셔 보시다니, 또다시 찾아오는 반성의 시간.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기에 급급했지, 정작 청춘을 다 바쳐서 금이야 옥이야 키워준 부모님께는 이렇게 소홀했을 수가 없다. 생각해 보니 1년에 두어 번 있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유명한 맛집이나 레스토랑 따위를 단 한 번도 먼저 나서서 모시고 가 본 적이 없었다. 남자 친구, 친구들하고나 실컷 돌아다녔지. 한국에 돌아가면 부모님과 맛집 투어를 해 봐야겠다. 이태원 루프 탑 바에 가면 얼마나 좋으시겠어. 화덕 피자랑, 수제 맥주랑.. 분명히 부모님은 모든 게 처음일 것이다. 어린 시절, 세상 밖으로 나를 끄집어내어 온갖 첫 경험을 시켜 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접한 세상을 보여 드릴 차례가 됐다.


 재밌다. 재미있는 하루였다. 딱히 여행을 왔다기보다는 아빠랑 온종일 밖에서 논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일정이 딱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다. 열이틀 동안 붙어있다 보니 이젠 아빠랑 데이트를 다 하고 있네. 수십 년 동안 단 한 시간도 단둘이 붙어있는 적이 없었던 우리가 종일 즐겁게 도시를 쏘다닐 수 있다는 것, 아빠랑 내가 썩 잘 맞는 데이트 상대라는, 함께 떠나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몰랐을 사실들을 깨닫는 것. 역시 여행의 힘은 대단하다.


이전 14화 핼러윈 퍼레이드 최고령 참석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