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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May 17. 2020

마치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2018. 11. 3. 열셋째 날

"잘 찾아가실 수 있죠? 저기 보이는 저 불 들어온 데가 역이고, 아까 알려드린 대로 한 층만 내려와서 오른쪽에서 지하철 탄 다음에 한 정거장만 가면 돼."

"알았다."

"혹시라도 길 잃으시면 전화하세요. 카톡 보내셔도 되고."


 그렇습니다. 아빠가 드디어 처음으로 혼자 지하철을 탔습니다, 여러분. (박수갈채) 오늘 저는 낮부터 밤까지 2명의 친구를 각각 만나야 해서 조금 바빴거든요. 대신 '오페라의 유령' 일등석 예매는 물론 극장 앞까지 모셔다드렸으니, 할 도리는 다했다고요.


 시작은 이러했다. 여행 둘째 날, 모교 투어를 하던 중 여자 화장실에 비친 내 모습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 풍경을 알아본 이들이 앞다투어 댓글을 달며 반가움을 표했던 바로 그날 밤, 다이렉트 메시지가 한 통 날아들었다.


"Gimme a call lady let’s catch up! 917-XXX-XXXX"


 발신인의 정체는 바로 Natalie였으니, 함께 마지막 학기 수업을 들었던 매력덩어리 아가씨다. South Africa가 고향인 그녀는 솔직한 입담과 행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로 교실을 휘어잡았었다. 아름다운 미소는 그저 거들었을 뿐. 졸업한 후에는 인스타그램에서 서로 '좋아요'만 가끔 누르며 근황을 확인하곤 했다. 이제 와 말이지만 나는 뉴욕에 온다는 말도, 은연중에 뉴욕으로 떠나는 것을 암시하는 '공적 게시물'도 올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뉴욕은 마치 거대한 허브(Hub)와도 같아서 수많은 사람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지만 잠시 머물 뿐, 그중 대다수는 각자가 있어야 하는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린다. 애초부터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리란 기대를 하기 어려운 곳이기에 조용히 갔다가 조용히 돌아오고 싶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떠나온 세월이 많이 흘렀고, 아빠와 내내 함께하는 여행이기도 했고, 불쑥 찾아온 여행자가 현지인의 일상을 침략하는 것을 원체 싫어하기도 하고. (뉴욕에 살 때 험한 꼴을 많이 당해서 더 조심스러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선뜻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해오니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전에, 먼저 만날 사람이 있다. 바로 현정 언니다. 우리는 기숙사에서 만났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뉴요커'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니 숨 쉬는 것조차 스타일리쉬해서 나는 그녀를 '캐리 언니' 또는 '현정 브래드 쇼'라고 불렀다. 새벽까지 과제에 시달리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던, 불만투성이었던 나에게 긍정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던 사람이다. 인스타그램으로 서로의 안부를 종종 확인해온 덕분에 만남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고 뉴욕에 가기 전부터 미리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놓은 유일한 현지인이었다.


"언니!!!!!!!!!!"

"어우, 야! 얘 그대로네!"

"언니도요!!! 여전히 간지난다!!"

"뭐래, 진짜. 얘 또 시작이야."


 그렇게 시작한 수다는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됐다. 같은 기숙사에 살던 사람들의 근황부터 시작해서 결혼, 가족, 일, 회사, 이직, 친구.. 떨어져 지내는 동안 모아놓은 각자의 이야기보따리를 쉴 새 없이 풀어 헤치다 보니 느낀 점. 사람 사는 거 어디든지 다 비슷하다는 거.


"사진 많이 찍었어?"

"많이 찍었죠. 아빠 사진만 실컷."

"그럴 줄 알았어. 부모님하고 여행하고 나서 보면 진짜 심각하게 내 사진이 없지 않니? 맨날 셀카만 찍을 수도 없고."

"맞아요! 아니, 아빠한테 사진 좀 찍어달라고 몇 번 부탁 했거든요. 근데 너무 이상하게(라고 쓰고 정직하게) 찍어주시는 거 있죠. 세상에서 가장 못생기고 짜리몽땅해 보이게. 그래서 그 뒤로는 그냥 포기했어요."

"내가 그 맘 알지. 인스타 감성을 어른들은 모르신다니까. 전신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시선을 두지 않고, 비율 좋게."

"내 말이, 내 말이!"

"오늘 내가 사진 많이 찍어줄게. 저기서부터 자연스럽게 걸어와 봐. 셔터 100번 눌러줄게."


좋아. 자연스러웠어

 감각쟁이 언니 덕분에 인생 사진 몇 장 건져 올리고 나니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작별을 고하고선, Natalie를 만나기 위해 ACE Hotel 1층 라운지로 향했다. 


뉴욕 감성이 짙게 묻어나는 ACE Hotel


"Hey!!!!!!"

"Oh my god. Look at you! You look great!"


(이제부턴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한글 번역판으로 적겠습니다)


"이게 얼마 만이야! 너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너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10년 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 반갑다! 네 연락 받고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네가 올린 학교 사진 보고 바로 연락했지. 어머, 희재가 뉴욕에 있네! 당장 만나야지! 하고 말이야."

"나는 네가 뉴욕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줄 알았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LA에 있다가,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어. 정말 다행이지 뭐야. 이렇게 널 만날 수 있으니. 타이밍이 좋았지."


 재주가 많던 그녀는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 요리는 맛과 향기까지 디자인해야 해서 어렵지만 그만큼 재미있다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과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 행복을 느낀다며 예전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그녀는 요즘 구상 중인 아이디어가 적힌 노트를 꺼내 보내주면서 의견을 물었고, 나는 요즘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걱정이라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리의 대화는 진지하면서도 유쾌했고, 서로를 향한 격려와 영감으로 가득했다. 10년 전 강의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너 완전 인기쟁이였잖아. 네가 뉴욕에서 그렇게 외로워한 줄도, 훌쩍 떠나버릴 줄도 몰랐어."

"내가!? 인기쟁이!?"
"네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가득했던 거, 몰랐어? 사람들이 너를 좋아했잖아. 너는 재밌고, 에너지가 넘쳤지."

 

 몰랐다. 내가 그랬다는 것을. 그때 내 영혼을 잠식했던 외로움은 스스로 친 가상의 울타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 기억과는 사뭇 다른 내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며 추억하는 장면을 마주하곤 하는데, 이런 순간들을 좋아한다. 대부분 그 기억에는 애정이 어린 시선이 담겨있고, 내가 보지 못한 당시의 풍경을 영화처럼 떠올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 아무리 생각해도 답하기 어려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다.


 칵테일을 각 2잔씩 비우면서 지금껏 만난 남자들 얘기, 요즘 유행하는 술집을 비롯한 갖가지 주제로 떠들다 보니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 됐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빠와 함께 또 보자면서, 우리는 마치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그리고 내일 또 볼 것처럼 담담하게 헤어졌다.


 어린 시절을 함께 한 벗을 만나는 일은 늘 즐겁다. 현재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타임머신을 타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순수했던 그때로 돌아가서 가식 없이 실컷 떠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나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조각들의 기원을 마주하는 때가 온다. 바로 오늘, 두 친구를 만나고 나니 알겠다. 생각보다 많은 조각이 뉴욕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9년 전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내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뉴욕이 별로였던 이유를 찾기에만 급급했었다. 좋았던 기억들마저 열지 않는 서랍에 넣어두고 꺼내 보지 않았다. 나를 부정한 셈이다. 오늘 만난 두 친구는 그 서랍을 열어서 안에 잠자고 있던 꽃들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나는 행복해졌다. 이제 더는, 뉴욕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만난 이들을 다시 만나려면 앞으로 10년, 아니 20년, 30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어쩌면 영영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이 서글프거나 아쉽지 않은 것은, 모두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빛을 내며 살고 있다는 것을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우리는 눈이 부시도록 찬란했던 20대 초반의 그 모습 그대로 신나게 떠들 것이다. 바로 오늘처럼.


+덧.

 언젠가 다시 뉴욕에 오게 된다면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3학년 때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수업하신 교수님이다. 그분의 가르침과 문장들은 아직도 내 삶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헤쳐나갈 힘을 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뉴욕에서 운영 중인 교수님의 회사에서 현장 실습 겸 수업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모두를 싣고 천천히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잠시 멈췄고, 한눈에 봐도 걸인으로 짐작되는 옷차림을 한 중년의 여인이 탑승했다.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교수님을 향해 거칠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전세 냈느냐,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느려졌다 등의 근거 없는 비난이었다. 몇 마디 쏘아붙일 법도 하건만, 교수님은 예의 그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로 잠자코 있다가 마침내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앞으로 인생을 살다 보면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겁니다. 그때마다 그들의 불행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지 마세요. 그것은 그들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저 조용히 지나가게 내버려 두세요. 기억하세요. 그들의 삶이 불행하다고 해서, 여러분의 삶까지 불행해질 필요는 없답니다."

 뉴욕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후, 나는 교수님께 따로 만남을 청했다. 온갖 이유와 계획을 다 갖다 붙였지만, 사실상 도피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장황한 변명을 정성스레 듣고 난 뒤에 교수님이 해 주신 말씀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희재야, 내가 아는 너는 정말 훌륭한 학생이자 디자이너란다. 너는 마음먹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사람이야. 혹시라도 너의 선택이 의심스러울 때면, 나를 떠올리렴. 내가 너를 보증한다는 것을. 네가 해야 하는 일은 그저 너의 코끝을 따라가는 일뿐이야. 내가 너를 믿는 만큼, 너도 너 자신을 믿길 바란다. 너는 어디서든지 성공할 수 있고, 언제나 행복할 거야."

 한국에 돌아온 뒤, 매년 1월 1일이 되면 아빠를 졸라 얻어낸 연하장을 교수님의 사무실로 보내드렸다. 그럴 때마다 교수님은 페이스북에 '편지 고마워요. 아름답네요. 잘 지내죠?' 등의 인사를 한글로 남겼다. 내가 만난 최고의 스승이자 멘토이며, 사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 교수님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분을 찾아갈 수 없었다. 사실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2014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서 교수님의 부고를 접하고선 한동안 멍해 있다가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분의 믿음에 보답할 수 있을 정도로 멋있는 사람이 되어서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싶었는데. 그러기도 전에 교수님은 너무 먼 곳으로 영영 떠나버렸다.

 교수님이 한동안 로그인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해 둔 내 링크드인 프로필에 갖가지 '전문 보유 기술'을 추천했고, 확인도 안 하는 페이스북 게시물에 '좋아요'를 열심히 눌렀을 뿐만 아니라 '생일 축하한다'라는 댓글을 꾸준히 달아주었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살면서 이런 스승님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설령 그런 행운이 내게 또 찾아오지 않더라도 괜찮다. 이미 만났으니까.


RIP: Mitch Shostak, 1950-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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