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재 May 07. 2020

핼러윈 퍼레이드 최고령 참석자

2018. 10. 31. 열째 날

 드디어 그날이 왔다. 뉴욕 최대 규모의 축제  하나인 핼러윈 퍼레이드에 동참하여 한국 귀신의 위엄을 보여주는 날이다. 애초부터 오늘을 염두에 두고 여행 날짜를 정했으니,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는 두말하면  아프다.   ''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열심히 모시고 다닌 것도 바로  순간을 위해서였다.


 정작 뉴욕에서 학교 다닐 때는 남들 노는  구경이나   알았지 귀신 대열에는 합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오히려 수업이 한창이던 늦은 시간에 할리퀸 차림으로 불쑥 들어왔던 학우를 짐짓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봤던  사실이다. 당연히(아빠 말로 하자면 오브가 코스로), 엄청 후회된다. 다들 이런 생각들  번쯤은 해보지 않으셨어요?  나는 학창 시절에   놀지 못했는가! 이렇게 평생 노동만 하고   알았으면 더욱더 적극적으로 놀걸! 지금 보니  놀던 애들이   사는  같은데!  이런 생각들 말이에요.


 스파르타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여행 가이드로서 하루에 한 가지 일정만 소화하도록 일정표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 터. 퍼레이드에 참석하기 전에 브로드웨이 뮤지컬 'Frozen'을 예약해 두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겨울 왕국'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디즈니의 영화를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이다. 극장까지는 도보로 단 7분. 슬슬 걸어가기로 했다.


"얼음 공주는 몇 시부터냐?"

"왜 자꾸 얼음 공주래. '겨울 왕국' 이라니까. 역시 별명 짓는 데는 1등이셔. 1시예요."

"걔는 얼음 공주, 너는 희재 공주."

"저를 공주라고 불러주시니 감사하긴 한데 조금 오그라드네요."

"오징어도 아닌데, 오그라들지 말아라."


 가히 수준급이라 받아치기 어려운 아빠의 개그 감각에 간신히 발맞추며 걷다 보니 어느새 St. James Theatre에 도착했다. 뮤지컬 티켓값이 절대 싸지 않은지라 볼지 말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작품이다. 내적 갈등을 단번에 종식하고 결제 버튼을 누르게 한 것은 바로 유튜브에서 우연히 접한 하이라이트 영상 덕분이었다. 엘사가 'Let it go'를 외치던 순간, 화려하게 펼쳐지는 무대 효과가 두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브로드웨이의 신기술을 총동원한 야심작이라고 하니 안 보고 그냥 돌아갈 수 없지. 게다가 '겨울 왕국'은 영화관에서 4DX로 세 번이나 봤을 정도로 애정 하는 영화가 아니던가?


 

 그래서  점수는요? 아쉽게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배우의 실력이나 무대가 별로였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바라는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LED 조명과 미디어 아트로 만들어진 세트는 확실히 볼만했지만, 너무 현대적인 느낌을 자아내서 ‘브로드웨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철컹거리는 톱니바퀴와 함께 천천히 돌아가는 무대 바닥, 삐걱거리는 나무 관절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사자탈처럼 아날로그  것들로부터   감명을 받는 (어느덧 고인 물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버린 탓일 수도 있다. 유튜브에서 커닝해 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보고 싶었던 영화가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소개될라 치면 채널을 황급히 돌리는 것도  때문이다. 김이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가 진작에 도래한 이상, 새로운 브로드웨이 무대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정작 나일지도 모른다.


 좋은 구경 했으니 이젠 우리가 좋은 구경거리가 되어 줄 차례다. 귀신이라고는 좀비밖에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한국 전통 귀신의 매운맛을 보여줘야지. 피부를 째서 속살을 보여주거나 머리를 관통하는 도끼 머리띠를 쓰지 않아도 아주 무서워 보일 수 있다 이거야.


"여기 이 까만색 도포 입으시면 돼요. 갓도 쓰시고. 오늘 밤에 아빠는 저승사자고, 난 처녀 귀신이야. 옷 다 입으시면 제가 분장시켜 드릴게요."

"무슨 분장을 또 하냐? 귀신 옷 입으면 됐지."

"분장을 해야 느낌이 살죠. 얼굴은 하얗게, 입술은 빨갛게 하고 피눈물도 그릴 거야. 아빤 저승 사자니까 눈이랑 입술이랑 까맣게 하고."

"별 걸 다 해보네."


한참이 지났는데 아빠가 조용하다.


"뭐 하세요?"

"화장실에서 분장한다."

"으잉? 어디 봐요."


대박. 누가 화가 아니랄까 봐 얼굴에 작품을 그려 놓으셨네.


"깜짝이야! 혼자 잘하셨네! 흠, 입술 옆에도 빨갛게 칠하는 게 어때요? 저승사자 보면 입꼬리가 위로 쭉 찢어졌잖아. 제가 그려드릴게요. 어디 보자.. 됐다. 어때요?"

"괜찮은데, 진짜같이 보이려면 명암 대비를 조금 더 주는 게 좋겠다. 보라색 물감 어딨냐?"

"여기요."

"... 자, 이거 봐라. 이렇게 안쪽을 어둡게 칠해 주니까 더 리얼하지 않냐? 할 거면 이 정도는 해야지."


역시.. 아빠 너무 좋아. 진짜 최고야. 국경과 세대를 넘나드는 이 시대의 진정한 아티스트.


정 부녀, 뉴욕 접수 준비 완료


"이제 어디로 가냐?"

"그리니치 빌리지라고, 거기서부터 행렬이 시작된대요. 지하철 타고 여기서 조금만 가면 돼. 귀신 분장 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낄 수 있다니까 우린 문제없을 거예요. 국제 미아 되지 않게 조심하세요. 사람들이 엄청 많을 거거든."

"알았다."


 지하철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앞에 서 있던 젊은 커플이 말을 걸어온다.


"와우. 무슨 분장을 한 거야?"
"한국의 전통 귀신이야. 아빠는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고, 난 결혼도 못 하고 죽어서 몹시 화가 난 처녀 귀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지금까지 본 핼러윈 분장 중에 제일 무서워 보인다."


 좋았어! 내가 원하던 반응이다! 시작부터 흥이 나는구먼!



 예상대로 인산인해다. 한국의 이태원하고 비슷한 모양새긴 한데 한 100배는 더 넓어 보여.


"사람들이 와서 같이 사진 찍자고 하면 이렇게 손을 귀신처럼 뻗어 주시면 돼요. 표정도 무섭게 하고. 진짜 저승사자처럼."

"알았다. 여기 재밌다. 멋있게 분장한 사람들이 많이 왔네."

"같이 사진 찍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씀하세요. 다들 멋있게 포즈 취해 줄 거야. 오늘은 그런 날이거든."



 아니, 볼거리가 이토록 많은 줄 알았으면 수업을 듣고 앉아있을 게 아니라 여길 왔어야 했네. 조금만 둘러봐도 지금 무슨 캐릭터가 유행하는지, 어떤 영화가 대세인지, 정치적 이슈가 뭔지 등 대중문화의 큰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니 말이다. 이런 게 진짜 살아 움직이는 디자인인데. 세계 문화의 중심에서 핼러윈이나 외칠걸.


 무엇보다도 표현과 노출의 한계가 없는 듯한 옷차림을  사람들과 상의를  벗어젖히고 트럭에서 신나게 몸을 흔들던 보디 페인팅 동호회, 아프리카 음악 동호회   특이한 사람들의 행렬을 보고 있자니 진짜 뉴욕답기 그지없다.


 예전부터 뉴욕을 일컬어 '멜팅 (Melting pot)'이라고 했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뜻으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곳에 모여 뒤섞이면서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에는 나라별 특성을 살려야 한다면서 '샐러드 보울(Salad Bowl)'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뭐가 됐든, 입속에 들어가면 똑같다는   생각이다. 야채수프나 샐러드나 매한가지지 . 채소가 백날 끓인다고 고기 되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가지 재료만 갖고는 그럴싸한 요리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는 점이지 않을까.


 이렇게  평생의 추억이 하나 더해졌다.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뉴스에 등장하기도 했을뿐더러 생각보다 우리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는 사람들이 많아서 아빠도 나도 신이 났다. (그렇다.   가문에는 관종의 피가 흐르고 있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울타리 안쪽에서 마치 주인공이  것처럼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걷는 기분도 제법 쏠쏠했다.


 앞으로는 아빠랑 좋은 곳도 많이 가고, 좋은 구경도  시켜 드려야지. 33 만에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다니, 불효녀 경연대회가 있다면 순위권은 따놓은 당상이다.  인제야 깨달아 버린 걸까. 아빠가  다리로 튼튼하게 걸어 다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아빠, 부디 나보다  건강하시길.


이전 13화 What A Wonderful World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