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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Apr 20. 2020

예술가의 여행법

2018. 10. 29. 여덟째 날

 오랜만에 푹 잤다. 퀸사이즈의 침대는 171cm의 거구를 자랑하는 내가 큰 대자로 누워 사지를 펼치기에 충분했고 바로 옆에 코 고는 할아버지(=아빠)까지 없으니 중간에 깨는 일도 없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굳이 나가서 봐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안락함이었다. 온종일 호텔 방에서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긴장 풀린 여행객의 고삐를 다시 말아 쥐게 하는 것은 바로 귓가를 때리는 폭포수의 굉음이다.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전 엄청나게 잘 잤어요! 오늘도 힘차게 구경하러 나가볼까요!"

"그래. 너랑 따로 자니까 너무 좋다. 오래간만에 편하게 잘 잤다."

"...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같은 침대에서 잘 일 없어요."

"오, 잘 됐다. 너 깰까 봐 신경 쓰면서 자니까 몸이 경직돼서 불편했는데."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근데, 저도 그랬어요. 게다가 전 아빠보다 키가 훨씬 크니까 훠얼~ 더 불편했을 것 같지 않아요?"

"... 잘났다."


 나이아가라를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은 단 7시간. 호텔 조식을 간단히 챙겨 먹고 가져온 모든 옷을 껴입은 채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딱 달라붙는 검정 히트텍 위에 느슨한 반팔, 그 위에 헐렁한 긴 팔 면 티셔츠, 그 위에 펑퍼짐한 회색 기모 맨투맨, 그 위에 난데없는 분홍색 경량 패딩까지 걸치면 뉴욕 관광객 패션 완성이다. 캐나다는 미국보다 춥고 비까지 내리니 스님이 입을 법한 옅은 회색의 경량 패딩 조끼를 한 겹 더 추가한 뒤, 청재킷 위에 우비를 입고 쁘띠 머플러+캐시미어 목도리를 목에 칭칭 감으면 나갈 준비 끝. 손발이 차기 때문에 양말은 무조건 두 개를 겹쳐 신어야 한다. 인간 엄마손 파이가 따로 없다. 사실 생존 본능을 발휘하며 이런 식으로 겹겹이 옷을 껴입는 의생활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두꺼운 오리털 패딩 대신 얇은 옷들만 여러 개 가져온 내 탓이다. 누굴 탓하겠어. 아빠는 안에 털이 달린 점퍼를 가져오셨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늘 그래 왔듯 나이아가라에서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모든 액티비티를 섭렵하고 싶었지만, 날이 춥고 흐린 데다가 결정적으로 힘들어 죽겠어서 욕심을 버리고 여유 있게 자연을 즐기기로 했다. 단 한 가지, 혼 블로어 나이아가라 크루즈(Hornblower Niagara Cruises)는 포기할 수 없었다. 빼곡한 나이아가라 관광객 후기를 훑어보니 여기까지 와서 혼 블로어 크루즈를 타지 않는 것은 일본에 가서 초밥을 먹지 않고 돌아오는 것과 같아 보였다. 여기서 잠깐! 혼 블로어 크루즈란? 나이아가라 폭포 중 가장 유명한 말발굽 모양의 호스 슈 폭포(Horseshoe Falls/Canadian Falls)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는 유람선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연이 내뿜는 거대한 물줄기의 위엄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유명한 액티비티다. 날씨에 따라 영업일을 정한다는 말에 마음을 졸이며 매표소로 향했다.


애써 웃어 보지만 피곤이 묻어나는 미소
아빠를 중심으로 왼쪽이 미국 폭포와 브라이덜 베일 폭포, 오른쪽이 우리가 잘 아는 캐나다 영토 쪽 폭포인 호스슈 폭포
열었다! 티켓팅 성공!


 잿빛 하늘과 짙은 청록색의 강물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궂은 날씨였지만 다행히 표를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탑승 후 나와보니 배의 운항이 중단되었고, 관광객 중 몇몇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 막차를 탔는지도 모르겠다) 탑승권을 매표소에 제출하고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예쁜 분홍색의 우비를 나눠준다. 입고 있던 옷 위에 우비와 모자를 뒤집어쓰고 모자에 달린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선 대자연을 온몸으로 맞을 준비를 마치고 나니, 때맞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서서히 움직이는 뱃머리
콰콰콰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한 비주얼


 배는 미국 폭포(American Falls)와 브라이덜 베일 폭포(Bridal Veil Falls) 앞에 잠시 섰다가 호스 슈 폭포로 향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던 작은 폭포들도 가까이서 보니 그 위엄이 만만치 않았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소리'다. 처음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꼈던 왠지 모를 이질감은 바로 '소리'였다. 나이아가라 폭포 사진은 어릴 때부터 실컷 봐온지라 직접 봐도 큰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물이 바윗돌 위로 떨어지며 내는 크나큰 파열음은 예상치 못했다. 몰랐던 사실인데 '나이아가라'는 원주민 어로 '천둥소리'를 뜻한다고 한다. 현지인들도 폭포의 크기보다는 소리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얼굴로 날아드는 물방울도 생소했다. 폭포를 따라 길게 난 산책로를 걷고 있으면 마치 부슬비가 내리는 것처럼 잘게 썬 물방울이 온몸을 적신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하도 물의 양이 많다 보니 폭포에서 튀기는 물방울이 거기까지 닿는 것이다. 그러니 한 가지 사물에 대해 눈에 보이는 정보만 습득하고선 전부를 아는 양 떠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사람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지닌 존재이거늘. 오감을 통해 실물을 느껴도 개개인별로 각기 다른 '생각'이라는 해석이 더해진다. 결국 나는 타인의 해석이 더해진 시각 정보만 보고선 마치 모두를 아는 양 자만했던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은 직접 경험해 봐야 진실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법이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님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서서히 호스 슈 폭포와 가까워질수록 얼굴이 젖어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물 범벅이 됐다. 선체를 쩌렁쩌렁 울리던 안내방송 소리도 물소리에 가려 점차 잦아들었다. 두근두근. 배는 진짜 여기까지 와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로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 코 앞까지 접근했다. 360도로 몸을 때리는 거센 바람과 물방울 공격에 나를 비롯한 탑승객들은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이 많은 물이 대체 어디서 났는지, 계속 이렇게 들이부어도 멈추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량과 위용이었다.


"오오!!!! 와 이거 장난 아니다! 눈 뜨기도 힘든데요!? 어마어마하다! 진짜 멋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위대함이네요! 그렇죠, 아빠!"


 음? 아빠가 어디 가셨지?


"아빠!!!!!!! 추워서 배 안으로 들어가셨나?"


 갑자기 사라진 아빠를 찾아 헤매다가, 선미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계시는 아빠를 발견했다.


"한참 찾았네. 아빠, 여기서 뭐 하세요?"

"이 구도가 마음에 들어서, 사진 좀 찍고 있다."

"저 앞에서 말발굽 폭포 보셔야죠! 저 쪽이 하이라이튼데!"

"여기가 그림 그리기에는 더 좋다."

"어차피 배는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니까 그때 더 찍으시고, 일단 저 앞에서 같이 폭포 구경하고 사진도 찍어요."

"알았다."


 잊고 있었다. 아빠가 산수화를 전문으로 하는 동양화가라는 것을. 그러고 보니 좋은 경치를 맞닥뜨린 순간 스케치북과 연필이 없으면 핸드폰부터 꺼내시는 분인데, 뉴욕은 빌딩 숲이라 그 빈도가 좀 덜했나 보다. 본격 '도시 도시'한 곳에 있다가 '자연 자연'한 곳에 오니 잠시 숨겨뒀던 아빠의 예술적 본능이 되살아났다.


"여기가 마음에 든다."

 

 아빠의 사진 촬영을 향한 열정은 배에서 내린 뒤에도 계속됐다. 밖으로 나가는 복도에 걸려있는 나이아가라 폭포의 풍경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찍느라 3분이면 될 거리를 빠져나가는데 족히 20분은 걸렸다. 기념품 샵에서도 마찬가지. 각종 액자와 엽서에 담긴 나이아가라의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는 아빠를 다행히도 가게 점원은 내버려 두었다.


마! 이게 예술가의 열정이다!


 아빠는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의미 있는 삶과 작품을 통해 후세에 이름 석 자는 남기고 죽어야 하늘이 주신 생명에 대한 도리를 다한다고 여기는 분이다. 30년 넘게 미술 선생님으로 일하면서도 '작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낮에는 교사, 밤에는 화가의 삶을 충실히 살아냈다. 미술실에서 매일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느라 아빠의 퇴근 시간은 늘 밤 11시였다. 11시에 수위 아저씨가 교문을 자물쇠로 걸어 잠갔기 때문이다. 아내랑 별거하냐는 말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길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말 같지도 않았을뿐더러, 아빠의 인생 철학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남들은 은퇴 후에 할 일이 없어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는데 아빠는 더 바빠졌다. 갑자기 캘리그래피 강사 자격증을 따고 문화센터에 강의를 나가시는가 하면, 매월 2만 원씩 15년 동안 모아 온 돈으로 얻은 작업실에서 자체 출퇴근을 하며 그림 작업에 열중하신다.

 

 밥벌이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아빠가 유니크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아빠 같지 않더라. 마음속에 '꿈'을 안고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인생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나라는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즉답할 수 있는 70세의 현인이 아빠라서 자랑스럽다. 1분 1초를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꿈'을 좇는 인생이 얼마나 멋지고 힘든 것인지, 아빠의 딸로 산 덕분에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어느새 내 인생 목표는 '아빠처럼 사는 것'이 되었다. 아빠 같은 삶의 방식 내지는 사고를 견지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호텔 복도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어제 식당에서 가져온 나초와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래고, 호스슈 폭포와 테이블 록 센터 사이에서 나이아가라 폭포의 바로 뒷모습을 볼 수 있는 저니 비하인드 더 폴스(Journey Behind the Falls)를 들른 것으로 나이아가라 여행은 마무리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한인 민박에서 머무르며 뉴욕 여행 2라운드를 펼칠 예정이다. 방에는 퀸사이즈의 침대와 라꾸라꾸가 놓여 있었는데, 나보고 큰 침대를 쓰라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며 아빠한테 양보했더니 진심으로 감동하신 눈치다. 생각해 보니 우리 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늘 내 차지였다. 난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외동딸이니까. 이제부터는 제일 좋은 것들을 부모님에게 드려야겠다. 난 하나뿐인 아빠 엄마 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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